"이념논쟁 말고 대한민국 정통성에 초점 맞춰야"

2008.10.23 10:07:25

■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논란

한국 근·현대사 검정교과서 6종에 대한 수정안을 정부가 이달 말까지 마련하기로 하면서 ‘교과서 검정체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이참에 ‘근현대사’를 국정교과서 체제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가하면 ‘역사교육자 선언’ 등 교과서 수정 반대 서명운동을 펼치는 무리도 있다. 이에 교총과 본지는 교과서 편향 논란을 객관적 시각에서 짚어보고자 교육학자와 현장 교사의 의견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좌담에는 박남화 교총 학교교육지원본부장의 사회로 김홍선 서울 신목고 교사, 박성윤 서울 중동고 교사, 이성호 중앙대 교수(교육철학), 홍후조 고려대 교수(교육과정) 등이 참여했다.





좌담 참여자들은 “사회적 합의성을 높이는데 기여하는 역사 교과는 검정 기준이 다른 교과보다 명확해야한다”며 “청소년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는 책은 교과서나 교재로 쓰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박성윤 교사, 이성호 교수, 홍후조 교수, 김홍선 교사.

홍후조 “의무교육기간은 국정 바람직, 현대사는 일반사회서 가르쳐야”
김홍선 “심의 단계서 폭넓은 의견수렴, 치우치지 않는 시스템 구축을”
박성윤 “검정기준 못 받아들이는 ‘편향된’ 교과서, 시장서 도태시켜야”
이성호 “교육청, 개별 학교의 의견 존중하는 미국제도 검토해 볼 만”


사회=‘근현대사’ 교과서 좌편향 논란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이성호=국가의 정통성을 문제시하는 책이 그 국가의 공교육기관에서 교과서로 사용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봅니다. 당연히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김홍선=이명박 정부에 들어오면서 논란이 증폭된 것은 교과부의 행정 책임이 큽니다. 교총에서도 성명을 통해 밝혔지만 교과부는 2002년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을 통해, 2005년에는 학계의 검증까지 거쳐 아무 하자가 없다고 공언해 놓고 올해 들어 새정부 시책에 따라 방향을 급선회했습니다. 물론 편향되고 왜곡된 부분은 시정, 보완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정권에 따라 교육 정책이 좌지우지된다는 코드행정 지탄을 면키 어렵게 된 것입니다. 정권이나 색깔론을 떠나 근본적으론 광복이후 1948년 건국까지의 3년 여 미군정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대한 집필진의 왜곡된 시각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성윤=이명박 정부는 지난 10년간의 정부를 좌파 정권이라 규정하고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며 정권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했습니다. 이런 정부의 보수적 성향에 편승해 현 교과서에 대한 보수 단체들의 불만이 교과서 수정 논란으로 발전했다고 봅니다. 결국 핵심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100년 대계를 바로 세우자’는 교육철학적 논리로 접근, 고치자는 것이 아니라 당리당략에 따른 정치적 논리로 교과서를 수정하자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이번 논란에 대해 좌편향, 우편향보다 헌법정신의 위배 여부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요.

홍후조=교육의 정치적 중립이라고 하나, 무엇보다 우리나라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헌법과 어긋난 것 같습니다. 교육에서 교과마다 기능과 역할이 다른데 특히 국가사는 결국 그 나라의 정체성, 자긍심, 통일성을 부여하는 핵심 기능을 부여받은 교육용 교과입니다.

이성호=이 문제는 헌법에 보장된 사상의 자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자유로운 국가라고 해도 공교육의 현장에서 사용되는 교과서가 그 국가의 이념이나 체제를 부정하거나 그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다른 국가를 미화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습니다.

김홍선=좌우의 색깔 논쟁으로 대립 구도를 첨예화하기 보다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민족사의 정통성이 과연 어디에 즉, 남과 북 어느 쪽에 있는가에 대한 입장 정리 차원에서 논점을 압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일부 교과서가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았고, 북한 입장에서 기술했다는 점도 논란입니다. 이에 대해 국사편찬위는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 교과서의 좌편향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는데요.

홍후조=교과서는 미래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이기를 바라느냐에 따라 기술되어야 할 것입니다. 통일된 나라가 자유 민주주의라면 이를 부정하는 정치 체제는 비판하고, 이를 긍정하고 확대하는 체제는 긍정해야할 것입니다.

김홍선=이제는 구소련의 외무성 비밀문서 등이 공개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찾아가 기습남침의 지원과 공조를 밀약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명약관화하게 드러났습니다. 이 같은 명백한 죄과에 대한 비판적 서술의 권유는 당연합니다.

이성호=맞습니다. 이미 분명해진 것을 아직도 외면하는 것은 분명 기만입니다. 이런 기만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박성윤=지적한 바와 같은 부분이 있다면 수정을 해서 남침의 원인과 대한민국의 입장을 명확하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검정 교과서란 저자들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교과부의 교육과정에 맞춰 검정기준에 준해 집필한 것인 만큼 수정을 하려면 지금과 같이 여론몰이 식으로 할 것이 아니라 교과부의 검정 기준을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고친 후 이를 저자들이 교과서에 반영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성숙한 법치국가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절차에 의한 검정 기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향된’ 교과서가 있다면, 교과부는 점정 교과서로 불합격시켜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도태시키면 된다고 봅니다.

사회=판단능력이 완성되지 않은 학생들에게 특정 사관이나 이념에 입각한 내용이나 잘못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교과서는 위험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역사교육과 역사교과서가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이성호=이는 학교교육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명백한 세뇌입니다. 비교육적은 물론 비윤리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의 교육에도(전체주의 국가 제외) 정치적 이념이나 특정 견해의 세뇌를 용인하는 곳은 없습니다.

홍후조=학생들에게 여러 가지의 역사 설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학생들은 아직 가치관의 형성기이고, 불행히도 정답을 찾는 시기입니다. 더구나 당대사를 교과서에 포함하면 일부 사람의 설에 근거한 a history를 정사인 the history로 둔갑시키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반사회로 옮겨야 합니다. 아예 1970년대 이후는 당대사로 해 역사서에서 제외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사회인이 되어 접할 수 있도록 함이 바람직합니다.

김홍선=특정한 사관이나 정치, 정권적인 목적으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이를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역사교육의 본령이라 할 민족사의 유구성과 정통성 및 현 국가체제의 긍정적인 측면 강조를 통한 국민 통합, 국민적 정체성 확인 등을 위한 일정한 방향성은 당연히 견지해야 합니다.

박성윤=좋은 역사 교과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전문적인 역사학계의 자기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역사학계의 대가들이 상아탑에 안주하며 자기 학설만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어떤 교과서가 필요한지 역사학계가 나서서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현행 검정제도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많은데요. 2011년부터 대다수 교과서가 검정제로 전환되는 데, 검정제 강화나 국정제 전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홍후조=국사에서 근현대사를 분리해 선택과목으로 한 것이나, 근현대사 교과서 채택을 염두에 두고 특정 사관에 경도된 이들로 하여금 집필하게 하거나, 분단시대사․반독재 투쟁․민주화 운동을 직접 경험한 역사교사들에게 특정 사관에 경도된 이들이 집필한 교과서는 매우 매력적인 교과서이기에 채택률이 높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재검정제도, 검정 탈락에 대한 항의와 법적 대응 등으로 시달리기 싫어하는 검정심사위원들이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는 느슨한 검정기준과 검정심사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습니다. 따라서 의무교육 기간은 국정으로 하고, 이후에는 검정으로 하되, 검정기준은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따라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김홍선=그렇다고 과거처럼 국사 교과서가 국정화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심의 단계에서 사학자 및 역사교육학자 뿐만 아니라 인접 학문 전문가, 학부모, 언론, 국사편찬위 등이 실질적으로 모니터링, 심사, 조정할 수 있는 폭 넓은 권한을 주어 한 쪽으로 경도되거나 목적지향의 오도 가능성을 사전에 여과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성윤=서구 선진국들과 일본은 검인정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는 다양한 해석이 있으므로 일찍부터 검인정제를 채택했습니다. 각계각층의 이해관계에 따른 다양한 요구를 국정이라는 하나의 교과서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훈민’하기 위해 국정 교과서를 고집한다면 ‘세계화’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낼 수 없습니다. 검인정제도는 다양한 교과서 중에서 수요자가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고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 맞는 제도라고 생각됩니다. 교과부는 검인정제를 철저히 보완해 한 단계 성숙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이성호=박 선생님 의견에 덧붙이자면, 우리도 해당 교육청이나 개별 학교의 의견을 존중하는 미국의 제도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결국 이번 교과서 논란도 정치권력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정권의 정파적 이익과 이념에 맞춰 교과서를 개편하는 악순환, 끊을 수 없을까요.

홍후조=앞서 말씀드린 데로 당대사를 역사교육에서 제외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 추세를 일반사회에서 가르치도록 해야 합니다. 역사로 편입하기에는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 날카롭게 대립하며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김홍선=교육의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 자율성 등은 헌법으로 보장된 사항입니다. 따라서 한시적인 정권이 정치적, 정략적 목적으로 교육목표 설정, 교육과정과 교육평가 등에 관여해 조령모개식으로 추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장기적 전략과 비전으로 전문가와 이해 관계자들의 주체적인 시각과 노력을 종용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박성윤=어느 국가나 민족에게도 역사의 명암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입맛에 맞게 잘한 면만을 부각하고 못한 면을 숨긴다면 그것은 올바른 역사교육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이 최근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든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은폐 내지는 왜곡을 함으로써 이웃 국가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역사교육은 정권에 상관없이 정직해야 합니다. 정직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서혜정 hjkara@kft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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