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위-클래스 앞에 한 학생이 상담선생님을 기다리며 안절부절 서성이고 있었다. 날씨도 차가운데 복도에서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잠시 교무실에서 쉬도록 했다. 한동안 상담선생님이 오시지 않자 머뭇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선생님이 대신 상담해 줄까?”
학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듯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으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한참을 울었다.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생이라서 별 근심거리가 없는 줄 알았다. 뜻밖의 돌출 행동에 당황스럽기도 했고, 과연 내가 상담을 잘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마저도 들었다. 마침 상담실 문이 열리는 반가운 소리에 선생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학생을 안내했다.
상담을 마친 선생님께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했다. 내용인 즉 목표하는 대학에 가고 싶은데 기말고사 성적이 좋지 않아 모든 게 물거품이 됐고, 부모님까지도 자기를 미워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황당한 답변이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같은 상담이 상당수에 이른다는 것이다.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1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 또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뿐이오. 그게 바로 나의 행복이다”라고 했다.
우리 교육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을 배우며 생활할 수 있는 학습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급생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며 살아야 하는 교육 체제이다. 그 결과 OECD 30개국 중 자살률 1위, 행복지수 25위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거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성적 만능주의 아래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보다 먼 미래를 생각하며 가치 있는 삶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한 학기 성적표에 목숨을 거는 삶은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 불행한 삶이 쳇바퀴 돌 듯 한다면, 불행한 삶이 습관으로 고착화 될 수 있다.
‘장자’의 인간세편(人間世篇)에 ‘행복은 하나의 깃털보다 가볍지만 거두어 가질 줄을 모르고, 불행은 땅보다 무겁지만 피할 줄을 모른다(福輕乎羽 莫之知載. 禍重乎地 莫之知避)’라 했다.
마음속에 행복이 있으면 늘 세상은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성적’과 ‘대학’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항상 서열을 다투는 싸움판이라는 관념 속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흔히 학교는 학생들에게 좋은 습관을 가르치는 곳이라 한다. 학교는 행복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 한번 잘못된 습관은 잘 바뀌지 않는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바로 습관이다.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는 “모든 성공과 실패의 95%는 습관이 결정한다. 좋은 습관은 어렵게 형성되지만 성공에로 이끌고 나쁜 습관은 쉽게 형성되지만 실패에로 이끈다”고 했다. 우리 학교 교육이 깃털처럼 가벼워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행복한 삶을 습관화 할 수 있도록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아니면 땅덩이처럼 무거운 불행한 삶의 역할에 익숙한 교육 환경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육자적 양심에서 자성(自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