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나누는 모둠일기

2006.04.26 13:37:00


4월부터 아이들과 모둠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아이들과 좀 더 가까이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 아이들과 협의 하에 모둠일기를 쓰기로 한 것입니다.

모둠일기를 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모둠장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모둠일기 쓰는 방법과 몇 가지 주의 사항 등을 적어 노트 첫 장에 부쳐줍니다. 그리고 모둠일기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가자는 취지임을 밝히는 게 중요합니다. 지나치게 강제적 접근을 하면 본래의 취지가 상실될 염려도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에선 개인 일기를 쓰기 때문에 좀 덜하지만 중․고등학교에선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서로의 마음을 터놓는 장으로서 모둠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처음 모둠 일기를 쓰기 까지 많은 생각과 망설임을 가졌었습니다. 모둠장 쓰는 일이 아이들에게나 나에게 또 하나의 일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둠일기 속에 드러난 아이들 생각을 읽어가면서 상담이나 단순한 대화를 통해서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 망설임이 기우임을 알게 됐습니다.

아이들의 글 속엔 남교사와 여학생이라는 관계에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이 들어 있어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속내를 알 수 있습니다. 글의 형식이 같은 모둠원 끼리 주고받는 편지형식도 있고, 그냥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경우 등 다양합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써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어디서 보고나 들었던 좋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식의 이야기도 적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이 쓴 글 뒤에는 같은 모둠원들이 댓글을 달아 서로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교사인 난 아이들의 글 뒤에 내 생각을 적어 둡니다. 어쩌다 시간이 없어 글을 써놓지 않으면 바로 항의성 발언이 따라옵니다. 엊그제 지희라는 아이도 그랬습니다.

그날따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어 댓글을 써놓지 않고 종례하러 들어갔는데 몹시 서운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선생님! 왜 제가 쓴 글에는 댓글 안달아 주셨어요?”
“실장한테 얘기했는데…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못 썼다고.”
“그래도요. 다른 아이들은 다 써주었으면서…”
“지희가 서운했나 보구나. 미안하다. 다음부턴 꼭 쓰도록 하마.”

그제야 녀석은 서운한 표정을 풀고 웃습니다. 솔직히 바쁠 땐 여섯 권의 모둠장에 댓글을 다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쓴 내용을 보고 아이들의 심리에 맞게 글을 써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학교 밖에서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를 많이 알게 되고, 아이들의 주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입니다. 글 몇 개를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아침 독서시간에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 책은 세 번의 자살을 시도한 여자와 세 번의 살인을 저지른 남자의 이야기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였는데 다소 나에겐 충격적이었다. 세 번의 자살을 저지른 여자와 세 번의 살인을 저지른 남자라니…생각만 해도 엽기적이고 끔찍했다. 그러나 나는 기대를 갖고 책을 읽어 내려갔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언가 ‘울컥’ 했다. 사회의 비판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나에게는 한 없이 작아보이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우리 반 실장인 민정이의 일기 중에서)-

민정이는 글의 말미에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조금이나마 덜게 되어서 좋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반에서 아침 독서를 하고 있는데 그때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적어 놓은 것을 보고 보람 아닌 보람도 느껴봅니다.

“종례를 하고 나와 소라는 진학반으로 갔다. 오늘은 영어 수업..졸려서 진짜 미치는 줄 알았다. 집중은 해야 되는데 눈이 감기고 휴.. 옆에서 지켜보던 현희가 내가 너무 웃긴지 막 웃었다. 으하하 그래도 두 번째 영어 수업은 집중해서 잘 들었다. 그 다음은 저녁 시간인데 그냥 군것질만 했다. 살 엄청 찔 것이다 분명! 흑..자율학습을 하고 9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소라랑 현희랑 민정이와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내가 버스를 타고 가는 걸 다 보고나서 다들 갔다. 친구들에게 무지 고맙다 흑..하하하 이렇게 오늘 하루도 끝나간다.” -(유진이의 일기 중에서)-

유진이는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가장 먼 아이입니다. 그런 유진이를 위해 친구들이 유진이가 타는 버스를 떠나보낸 후에 각자 집으로 간 모습과 공부의 고단한 모습을 요즘 아이들처럼 솔직하고 재미있게 써놓았음을 볼 있습니다. 상담이라는 걸 통해서는 얘기를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글을 읽고 유진이의 글 뒤에 이렇게 적어주었습니다.

“좋은 친구들과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란다. 힘듦도 함께 할 친구가 있음으로서 이겨내리라 본다. 그리고 유진이가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본다. 힘내구.”

모둠일기를 통해 난 지희가 콩나물 국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알게 되었고, 우리 반 아침 독서 시간에 아이들과 온전히 책을 한 번 읽었으면 하는 소망을 보인 선도부원인 소라가 책을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은이 왕선이 혜영이가 동방신기의 열성 팬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취향이나 관심사를 알게 되자 아이들과 대화도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대화의 폭도 넓어짐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모둠일기를 서로간의 친밀함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의 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둠 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은이라는 아이의 생각을 적어볼까 합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그래도 이곳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참 좋다. 우리 서로 더 친해지도록 하자. …… 선생님 감사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일기를 쓸 수 있게 해주셔서요. ^ . ^”
김 현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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