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힘이 납니다

2006.06.21 10:08:00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 매일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벌써 4년이나 되어 갑니다. 정규 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힘이 빠지고 피곤을 느낍니다.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빨리 퇴근하고 싶은 생각이 꿀떡 같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있고 선생님들이 계시는데 일찍 갈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다가 학교바깥에서 들려오는 교감제 폐지니, 교장 공모제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면 기가 막히고 그만 의욕을 상실하고 맙니다. 더 이상 근무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현재의 위치에서 저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공직자의 바른 자세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며 힘과 용기를 냅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고 기를 죽이고 자리를 흔들고 해도 학교 안의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힘이 납니다. 생기 있고 발랄한 학생들의 방과 후 활동을 보면 용기를 얻습니다.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의 모습들을 보면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우리학교는 보충수업이 끝나면 오후 6시가 됩니다. 그 때부터 3학년은 오후 7시까지, 1.2학년은 오후7시 20분까지 저녁식사시간이 됩니다. 이 시간에 운동장 트랙을 돌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나며 새 힘을 얻습니다.

넓고 푸른 운동장 잔디를 보며, 운동장 맞은편 푸른 담쟁이들을 보며, 6월을 상징할 만큼 생명력을 과시하는 등나무를 보며, 잔디 속에 숨어 있는 어린애 손바닥만한 민들레가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서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됩니다.

저녁식사 후 학생들의 활발한 모습을 보게 되면 다시금 힘을 얻습니다. 김정한의 ‘사하촌’을 읽고 있다가 저를 보고는 인사하는 학생도 만나고, 트랙을 돌면서 다정스럽게 인사하는 학생들을 만나고, 잔디에 둘러앉아 손뼉 치며 놀이하는 학생들도 만나며, 푸른 나무에 있는 계단에 앉아 간식을 먹는 학생들도 만나며, 여기 저기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도 만나며, 나무 아래 앉아 미래를 꿈꾸며 설계하는 학생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면 하루의 피로도 잊은 채 저녁을 아침처럼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하게 됩니다.

야간에 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과 선생님들의 활발한 활동을 보면서 용기를 얻습니다. 아침의 감동이 밤에도 되살아납니다. 그저께 밤 9시쯤 1학년 교실을 지나니 수많은 학생들이 골마루에 책상을 내어놓고 양쪽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학생은 서서 공부를 합니다. 어떤 학생은 마루에 앉아서 합니다. 그야말로 가장 편한 자세로 열심히 공부합니다. 아마 이런 모습들 비디오에 담아 학부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2학년 골마루를 지나가니 어떤 학생은 선생님에게 질문한 수학문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교실에는 여기 저기 선생님이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연세 많으신 여 선생님께서 담임도 아닌데도 고혈압으로 고생을 하시는데도 골마루에서 책을 보면서 학생들과 함께 하더군요.

3학년 골마루를 지나가니 꽃을 사랑하는 원로 선생님께서 골마루를 지나가더군요. 교실에는 여러 선생님께서 교실을 지킵니다. 3학년 학년실에는 학생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교무실에도 마찬가지로 학생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교무부장 선생님께서도 평소와 같이 교무실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방과 후에도 정상 시간과 마찬가지로 생명력이 넘치는 활동을 보면서 감동, 감동을 하며 하루의 피곤은 싹 사라지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저께 매일 밤 학교를 지키는 원로선생님 한 분이 학교 뒤편에 빈터를 이용해 상추와 쑥갓을 심었는데 그걸 따서 집에 가서 먹으라고 비닐봉지에 넣어 냉장고에 넣어놓았네요.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선생님께서 저를 대하는 모습 보고 감동을 먹으며 퇴근을 하였습니다.

요즘 외부의 많은 목소리 큰 사람들이 기를 죽이고 힘을 잃게 해도 내부에서 변함없는 선생님들의 열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힘을 얻게 되고 학교 사정을 잘 알고 계시는 원로선생님께서 비록 보잘것없지만 작은 정성으로 저를 위로해 주니 그것이 감동이 되고 용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살맛나는 방과 후 학교생활을 지탱할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문곤섭 전 울산외국어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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