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있어 하나의 대상을 보는 관점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진리라고 믿어왔던 지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거울에 비친 유럽’에서 필자는 자신의 속한 세계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 성찰은 흔히 ‘우월하다’ 고 인식되는 세계에 대해서,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기에 더욱 값지고 의미가 있는 듯하다.
저자는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인류는 거울을 통해서 세계를 보아왔음을 말하고 있다. ‘거울’은 자아와 타인과의 인식이며 구별이며, 왜곡이다. 자신과 다른 세계를 접할 때, 그 ‘차이’는 곧 ‘차별’로 바뀌며 스스로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차이를 열등함으로 왜곡하고 만다. 그것이 현 유럽중심의 사회를 만드는 기간이 되었으며 필자는 그러한 시각에서 벗어나 진실로 세계를 보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은 유럽 문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는 몇 가지 논제를 다른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한다. 그것은 야만, 기독교, 봉건제, 악마, 촌뜨기, 궁정, 미개와 진보, 그리고 대중이다. 그것들은 유럽이라는 이름 하에 숨겨진 사실들을 좀더 진실되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그 왜곡된 생각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분명 유럽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비유럽인인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유럽의 거울로서 보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짧게 논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있는 그곳을 말해주고 또 우리가 나아갈 곳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 유럽은 무엇을 연상시키는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유럽은 자유와 평등, 문명, 그리고 높은 삶의 수준 등의 이미지로 다가올 것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인으로서 우리들은 유럽을 닮기 위해서 노력해왔고, 그 것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같은 사회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들과 같은 이념을 중요시하며, 그들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그들이 보기에 어떤 모습인가. 유럽인들이 他로써 우리들 我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할 것인가.
그 대답은 ‘개발도상국’이라든가, ‘빠르게 문명화한 나라’ 정도로 예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모든 대답에 앞서서 우리를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작고, 노란 피부를 가진 아시아인일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인식하는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느끼는 스스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기 때문이다.
황인종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그들을 백인종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자가 비문명화와 미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진보와 자유나 평등과 같은 수준 높은 가치를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이 분명 서구인들에게서 유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생각에 철저히 세뇌되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점차 마치 유럽인들처럼 큰 키와 쌍꺼풀 있는 눈, 뚜렷한 코 등을 선호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외관상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은 생각의 방식이다. 아시아는 전제주의 국가의 잔재가 남아있는 곳이고, 유럽은 일찍부터 자유주의가 발달한 우수한 문명이라는 생각은 우리 모두에게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그 결과 한 세기만에 우리 삶의 양식을 유럽의 그것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유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길을 따라오기 위해 애쓰는 불쌍한, 아니면 기특한 몸부림으로 보일까.
분명한 것은 유럽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며,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그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며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왔던 길도 그만큼의 가치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유럽인들이 만들어놓은 길은, 그들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이니만큼, 우리에게 대해서는 철저한 타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 타자의식은 그들 스스로를 더 우월한 존재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가져다주었으며 그들은 그러한 의도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그 길이 그들의 의도 하에 만들어진 것임을 망각하고 그길을 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 역시 유럽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완전히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우리가 생각하는 열등 민족에게 대하는 생각을 돌이켜 본다면 유럽인들이 우리에게 대하는 그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일종의 연민이며, 비웃음이며, 자만감이다.
우리가 이제껏 달려온 이 길은 우리가 선택한 길이기 보다는 선택을 강요당한 길이다. 우리가 한 사고라기보다는 강요당한 사고이다. 그 사고를 옳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는 유럽이라는 거울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은 갖지 못한 채 그들의 거울을 통해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며, 그런 이유로 우리는 그들처럼 되는 것이 발전의 길이라는 잘못된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며 나아가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우리 스스로의 거울 ‘우리 자신의 거울’은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설정한 기준이며 길이다. 이제 유럽적인, 서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의 기준으로 세계와 우리를 바라보는 일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각을 정립하는 데 앞서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我와 他의 의식을 명확하게 정립하는 일이라 본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방법으로 말하자면, 일그러진 거울 대신에 곧은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본다거나, 아니면 편협한 거울 대신 창으로 건너편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개념에 대해서 재정립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종, 문화, 그리고 차이이다.
인종은 인류를 구분하는 큰 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잣대는 분명 일부의 시각을 반영한 것일 뿐 전 인류의 의지를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인류를 구분하는 기준은 어떠한 타당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마도 생리학적인 근거가 가장 타당성을 갖는 것이겠지만, 그 역시 이렇다할 보편적 동의를 얻지는 못한다. 이른바 ‘종’이란, 이 책에 따르자면, 서로 교미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는 집단을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인종이라는 의미는 다분히 편파적이며 의도적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 ‘인종’이라는 구분 안에는 외관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근거 없는 성정의 차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종을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는 나와 다른 누군가를 임의로 결론짓는 위험한 발상이다. 하물며 누구의 동의도 없이 유럽인들이 스스로 만들어서 세계에 강압적으로 전파시킨 그 개념은 결코 타당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인종이 가시적인 차이를 언급한 것이라면, 문화는 내면적인 차이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들지 않더라도 문화는 인종을 넘어서는 비교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문화는 환경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비교 혹 대조는 상당히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로 존재해야 할 문화는, 오늘날 상대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결과 우열과 열등 문화의 구분이 생겨나고 나아가 문화의 몰락마저 조장되고 있다.
인종과 문화. 현 세계에서 가장 큰 문제이자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이 문제는 ‘차이’라는 한 마디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차이는 인류를 사분오열 찢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인류가 서로 몰락의 길로 가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차이는 사라져야 하는가. 인류는 하나의 잣대 하에 일반화됨이 옳은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바뀌어야 할 것은 이러한 차이가 아니라 차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차이는 우열과 열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경멸이나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해야 한다. 차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질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질서와 똑같은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거울로서 나 스스로만을 바라보고 남과 비교해가기 보다는, 세계를 향해 난 창으로 밖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것은 결코 진리를 찾을 수 없지만, 남 속의 나로써 나를 판단하는 것은 진리로 한걸음 나아가는 일이다.
‘거울에 비친 유럽’은 세계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야만은 ‘타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었고, 이단과 악마는 그러한 인식이 증폭된 결과였다. 진보와 미개라는 개념은 서구의 산물이지 진리는 아니며, 촌뜨기 또한 타자의식의 결과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쉬운 책은 아니다. 이 책 안에는 수많은 학자들의 지식이 들어있으며, 유럽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반문과 자기 반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비유럽인인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비단 유럽인에게 국한되지 않은 전인류적인 과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관용이며 열린 시각이며,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차이가 곧 위협이나, 스스로의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물론 우월함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인종과 문화는 한 생활 방식일 뿐이지, 차별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유럽적인 사고를 받아들였고, 지금 그 사고는 우리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정체성 없는 수용이란 곧 스스로의 망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유럽적인 잣대에 빠져들어 우리의 정체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그들과 같은 외양과 사상을 자지려는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울은 나를 비춰주는 도구이고 동시에 남과 비교하게 하는 도구이다. 거울에 스스로를 비춰보며 바꿔 나가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두루 볼 수 있는 열린 시야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거울에 비친 유럽’은 유럽인의 진지한 자기 성찰이며 반성이다. 이제 비유럽인으로서 우리들도 올바른 성찰을 할 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