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화, 사회 이 세 가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인류학은 현재의 생활보다는 과거의 흔적들을, 내가 살아가는 이 공간보다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잘못 인식되어 지루하거나 비실용적인 학문으로 천대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마빈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와 지금 소개하려는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를 살펴보면 이러한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려는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겠지만 ‘문화 속에 무슨 수수께끼가 있다는 것인가?’ 또는 ‘낯선 곳에서 어떻게 나를 만나는가?’ 라는 식으로 독자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한 의도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 또는 타문화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그 흥미로운 부분만을 강조하고 홍보하려는 관광책자 종류의 책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인류학의 잘못된 인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인류학에 대한 시선을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은 충분히 칭찬할만 하다고 할 수 있겠다.
목차를 살펴보면 1장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난다‘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13장 ’새로운 현장들‘을 끝으로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에 독자가 이 책에 대한 사전 정보없이 그 목차만을 살펴보고 책을 고른다면 아마도 이 책은 매우 흥미없는 개론서정도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 그만큼 목차를 살펴보면 기존의 개론서와는 특별히 다른 점을 발견하기 어려우며 대학강의교재 정도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서 살펴보면 첫 장부터 매우 흥미로운 부분을 느낄 수 있다. 문화 상대주의에 대한 사례 제시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타문화와 자신들의 문화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옳고 또한 이러한 행동이 충돌없이 살아가는 길이라고 알고 있을 만큼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하고 있다. 브리지트바르도가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개고기 식용문화를 비판했을 때 사람들이 하나같이 문화상대주의도 모르는 여자라고 비판한 것만 보아도 일반인들의 이러한 상대성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너무나도 보편화된, 그래서 다시 설명을 하게 될 경우 자칫 지루하게 보일 수 있는 “문화상대주의”라는 용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똑같이 위에서 언급한 개고기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던가 일본과 우리나라의 식습관에 대한 서로의 인식차이 등을 언급하고 넘어갔다면 그것이야말로 교과서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서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독특하게도 한 인류학자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티브족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례 제시를 통해 죽은 사람의 혼과 악령에 대한 시비, 햄릿의 작은 아버지가 햄릿의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 복수는 동년배 친구들이 하는 것이라고 나이 많은 친척에게 폭력을 쓰면 안된다는 것 등 여러 부분에서 그 해석에 있어서의 문화적 차이에 따른 이해의 차이를 보여주고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흥미유발에 있어서의 성공은 곧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효율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러한 사례 제시를 통해 상대성에 대한 개념은 확실히 전달했을지 몰라도 그 대대(쌍대)적 개념인 제일성에 대한 개념의 전달에는 오히려 실패한 듯 보인다.
어떤 사물의 ‘앞’이라고 말을 하였을 때 그 ‘앞’이라는 단어를 안다면 ‘뒤’라는 단어의 존재또한 알고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앞’과 ‘뒤’라는 단어는 서로 의미는 반대되지만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개념 속에서 함께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대대(쌍대)라고 한다. 이처럼 대대의 개념이 적용되는 사례는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다 다르다’ 라는 말은 곧 그 대대적 개념인 ‘모든 사람은 결국 다 같다’ 라는 말의 존재를 알려준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다 다르다’는 말은 문화의 상대성과 결부시킬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은 결국 다 같다 라는 말은 문화의 제일성과 결부시킬 수 있는 개념이다. 결국 상대성에 대한 전달이 중요한만큼 그 대대적 개념인 제일성에 대한 언급 또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제일성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독자에게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해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라고 서두에서 주장을 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사람은 다 같은 것이니 보편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한다면 모순된 주장을 펴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독자에게 자칫 혼란만을 줄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학에 있어서 상대성과 제일성, 그리고 총체성 이 세 가지 기본 개념은 모든 연구의 기본이 되고 있는 만큼 이러한 부분에 대한 적절한 사례제시와 언급을 통해 독자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정립해 주는 것도 중요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전반적인 사례와 내용에 있어서 그 핵심적인 개념은 상대성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곳과는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을 보여주면서 이런 것도 있다 라고 흥미를 유발시키고 또한 이러한 것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성의 개념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얌전한 인디언인 주니족과 사나운 야노마모족을 보여주면서 양 극단의 사례를 통해 문화에 따라 각 민족의 인성이 결정된다는 시각으로 결론을 맺는 3장에서 작가는 상대성의 시각을 더욱더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상대성에 대한 요구는 독자에게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이해는 하겠는데 그렇다면 나에게는 무슨 의미지? 그냥 아무런 비판도 하지말고 그냥 알고만 있으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몰라도 되는 사실을 왜 알려고 하는 것인가?”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결국 이는 더 이상 책을 읽도록 하는 유인을 줄어들게 할 것이다. 상대적인 시각으로 두 문화를 이해하고 이러한 기본 바탕 위에 제일성에 관한 개념을 설명해 줌으로써 제일성의 시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상대성의 대대적 개념인 제일성에 관해서 언급을 했고 이러한 일방적인 상대성에 대한 강조가 책의 전반적인 서술의 균형을 흐트러트리는 부분에 대한 비판을 해보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문제점만을 해결한다면 서술에 있어서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니다.
위에서 인류학에 있어서의 세 가지 중요개념을 언급했는데 그 중에 한가지 아직 언급 안한 부분이 있다. 바로 총체성이다. 사실 인류학에서 총체성이라는 말은 인류학자들이 즐겨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있어서도 과연 총체적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냐고 묻는 다면 난처해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는 ‘총체적 접근’이라는 용어의 답습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총체적이라는 개념이 언어로 규정하기 힘들고, 어쩌면 인류학에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고 자신들의 학문 영역을 고수하기 위한 하나의 진입장벽으로 존재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성에 대한 허무를 핑계로 그 논의를 회피하기에는 서술의 균형이라는 가치가 너무 크게 다가온다.
전경수 교수는 총체성에 관한 이해를 돕기위한 사례로서 전남 완도 남단의 자지도(者只島)의 생태학적인 균형의 파괴현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태의 파괴가 단순한 하나의원인때문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부분, 산림생태적 부분, 조류생태적 부분, 해양생태적 부분 그리고 기후, 토양 등의 부분들이 모두 하나의 전체 체계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으면서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총체성은 ‘부분의 합은 전체와 동일하다’ 라는 사고(andsum)를 부정하고 문화가 내포하고 있는 통합성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9장 경제 - 좋은 것은 제한되어 있는가' 라는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장에서는 농민들이 기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한정된 '제황의 이미지(Image of Limited Good)'를 가지고 있다는 것, 티브 사람들의 놋쇠막대 문화 등을 언급하면서 결국 경제발전이 나라마다 다른 이유를 집단의 인지적 성향이 담겨 있는 문화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 이유로 집단의 규범적 행동이 특정한 인지적 지향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이런 행동이 합리적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그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며 이는 인류학 및 문화 연구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인류학이나 문화연구를 비실용적이라고 치부해왔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가치창출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러한 면을 잘 알고 있는 듯 보란듯이 문화가 한 국가의 경제발전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이는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의욕이 앞선 나머지 인류학의 기본 개념인 총체성의 개념을 무시해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문화는 경제 발전의 한 축이 될 수 있고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전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자지도 섬의 생태파괴를 바라보는 시각처럼 한 나라의 경제 발전도 여러 분야의 총체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고 분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경제학 서적에서는 경제 발전의 원인을 경제의 효율적인 운용과 가치창출에만 주목해서 서술을 하고 있는데 왜 인류학 책이 경제발전을 인류학에 주목해서 서술한 것을 비판하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경제학 서적은 그 책의 기본 목적 자체가 경제발전의 방책을 서술하는 것이기에 무리가 없지만, 인류학 책은 그 서술의 목적이 경제발전이 아니기에 문화와 인류 그리고 경제발전을 연계시켜 서술하는데 있어서 좀 더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서술이 인류학 서적으로서 경제발전에 대한 적절한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그 해답 또한 이 책에 담겨 있다. ‘제 13장 새로운 현장들 - 회사에 간 인류학도, 인류학자여, 이제는 위를 보자!’ 를 통해서 작가는 인류학이 경쟁력과 최대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 적용되는 실용학문으로서 거듭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인류학 전공을 한 수잔이라는 사람이 UTC라는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게 되면서 관리자로서 직원들을 대할 때 민족지적 접근방법을 통해 기업의 효율성을 높였다는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 작가는 다소 고무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여러 번 언급했지만 학문의 비실용성이나 비현실성(여기서 비현실성이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에 적용하기 어려운이라는 뜻으로)에 발목을 잡혀 항상 뒷전에만 밀려있던 인류학이 빛을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9장에서처럼 문화와 경제발전과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자칫 비약적이고 총체성의 개념을 무시했다는 비난을 받기보다는 13장과 같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례 제시를 통해 인류학의 새로운 방향과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 더욱더 일반 독자에게 설득적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인류학의 기본개념인 상대성, 제일성, 총체성을 평가의 준거로 상정하여 책 한 권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책의 모든 부분을 세세히 살펴보고 꼼꼼히 내용정리를 통해서 살펴보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 목적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는가, 논리전개에 있어서 무리는 없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더욱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소 많은 내용적인 부실함이 보일지 몰라도 몇몇 중요 장만을 뽑아서 평가하고 생각해보았다. 전체적인 평가는 일반인의 흥미를 끌고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면에서는 그 작가의 의도를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기본 개념에 충실하지 못하고 서술의 균형을 놓친 대목이 부분부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부분만을 바로잡는다면 마빈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이후에 새롭게 일반인에게 다가오고 있는 인류학의 입문에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