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11 테러 사건을 통해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의 주범인 테러단체를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미국의 강압 정책에서 찾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관점과는 다르게 사건의 원인을 문명간의 충돌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었다. 테러 사건을 문명간 충돌로 이해하려는 이들로 인해서 서점에서는 이슬람관련 서적과 서양사 관련 서적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서양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9.11테러와 같은 사건은 흥미로운 분석의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한국사에 밀려 외면 받아왔던 사람들의 관심을 새롭게 유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지난 7,80년대 군부정권을 거치면서 역사연구에 있어서 한국사는 반공교육 및 정권유지라는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국가 차원의 연구와 지원이 많았다. 반면에 서양사는 학교교육에서도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러한 정책 속에서 한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니까 꼭 알아두어야 하며 그것이 마치 기본 필수 ‘덕목’인 것처럼 인식되어 온 반면 서양사는 선택과목에 불과하니까 대강 시험 전날에만 공부하면 되는 ‘교양’으로 치부되어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서양사에 대한 인식은 생소한 인명, 지명, 사건명을 달달 외워야 하는 과목으로 인식되었고, 그 이미지는 어렵고, 힘든 것으로 굳어졌다. 지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양사라고 하면 손을 내젓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국내 서양사 학자들의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라는 것이 군부 정권 속에서 강압적 통치로 인해 자기 보신주의적 반론을 펼치는데 그쳤으며, 한국사학자들과 역사 해석에 있어서의 논쟁을 통해 학문적 필요성을 설득해 나가는 소극적인 방식을 취함으로써 대중과 오히려 유리되어 버렸다. 결국 지식층들만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짐으로써 대중들은 서양사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해결을 위해 이제는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주장이 하나씩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지금 소개하려는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윌리엄 L.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푸른역사)라는 책을 그러한 주장을 근거로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역사 서술에 있어서의 관점, 목적이라는 분석틀을 기준으로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라는 책에 대해 분석한 후 나아가 서양사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관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이 책은 윌리엄 랭어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해당 분야의 역사가들이 서양사의 큰 흐름을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투와 이야기식 진행으로 쓴 역사에세이 17편을 엮은 것이다. 책에서 사용된 용어들은 결코 생소하거나 학문적인 단어가 아니며, 교과서에서 접했던 암기식 단어의 나열에 그치는 재미없는 서술이 아니라 마치 이야기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즉, 이 책은 한 마디로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다소 격하게 말한 듯 하지만 엮자 윌리엄 랭어 역시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책의 목적이 대중에게 좀 더 쉬운 역사를 소개하고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최근 TV프로그램 편성 비율을 보면 시청률을 쉽게 끌어올릴 수 있는 재미 위주의 오락, 예능 프로그램의 편성을 늘리고, 뉴스 등 시사 정보 프로그램의 편성을 줄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학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점점 감각적이고 단순한 재미를 추구하는 일반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딱딱하고 지식전달에 치우친 재미없는 역사책들보다는 이야기 형식의 흥미와 재미를 유발시키는 이러한 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재미 위주의 서술이 항상 대중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누군가의 흥미를 끌고 재미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그 내용에 대한 집중도를 높일 수 있고, 사실 전달의 효율성 또한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서 내용의 객관성을 저하시킬 수도 있으며 독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혹자는 “서론에서는 국내 서양학계의 어려움과 안 좋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고 말을 해놓고 이제 와서 이러한 대중과의 친밀성을 높이는 작업이 유익하다고만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면 이것은 모순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중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위에서 밝혔듯이 국내 서양학계는 점차 대중과 멀어져가는 어려움에 처해있고 이것은 서양학계에 대한 관심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대중에게 가까이 가는 작업과 노력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친 나머지 객관성의 결여로 이어지고 서술의 균형을 잃어버려서 흥미 위주의 스포츠 신문 기사성 추측이 난무하고 심지어는 역사의 왜곡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이 책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이 책의 단점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식전달과 흥미유발 중에 무엇에 무게를 둘 것인가?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책이 항상 고민하는 부분일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단연 흥미유발이라는 부분에 그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은 분명하다.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까지” 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랜 기간의 역사를 단지 17개의 주제에 한정시켜서 그 주제를 중심으로 책 전체의 내용을 전개하고 있으며, 17개의 주제를 서술하는 데에도 기존의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참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당연히 독자에게 새롭다, 흥미롭다 라는 느낌을 가져다 주며 결국 이는 흥미유발이 서술의 목적임을 밝힌 엮자의 말에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흥미유발에 대한 목적이 지나친 나머지 두 가지 거슬리는 부분이 눈에 띈다.
첫째, 구성상의 연계성이 부족하다.
이 책의 구성은 설명했듯이 17개의 역사에세이를 윌리엄 랭어가 엮은 책이다. 한마디로 각각의 챕터들은 원래 각각의 독립된 글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부분을 각각의 주제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방향으로 엮어주는 것이 엮자의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각각의 주제들이 도대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책으로 엮일 수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단순히 이러한 시각은 기존의 시각과는 많이 다르니까 사람들이 읽으면 재밌어 하겠군. 하는 생각에 억지로 끼워넣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 새로 읽는 법”이라는 챕터에서는 호메로스가 실존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의혹과 그가 서술한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같은 서사시가 정말 직접 쓴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준다. 그러나 그 후에 소크라테스의 재판,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두 세계, 노예상인 티모테오스의 생애 등의 내용이 이어지지만 이러한 각각의 내용들간에 어떠한 연계성도 보이지 않는다. 단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서양사라는 것뿐이다. 이러한 취약한 연계성은 독자로 하여금 원래의 목적인 흥미유발의 효과를 저해시킬 수도 있다.
독자는 읽으면서 왜 자신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지에 대해 항상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내용들이 하나의 통일된 맥락없이 단편소설 읽듯이 재미난 역사 이야기의 나열에 그친다면 책을 읽는 동기유발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혹자는 방대한 양의 역사와 긴 시간을 단지 17개의 주제로 한정시켜 하나의 책으로 엮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아니냐며 그 주제간에 연계성을 갖도록 구성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역사와 긴 시간을 다루고 있기에 오히려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큰 틀을 짜고 그러한 틀에 맞추어 통일된 맥락을 가진 주제를 선정하여 역사를 서술하는 작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스가 이룩한 두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알렉산드로스 제국이 남겨놓은 유산은 헬레니즘 세계이며 이 세계는 보편주의, 전 세계인의 결속, 인류의 협력 등의 개념을 역설한 알렉산드로스의 꿈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다음 챕터에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러한 구성보다는 알렉산드로의 헬레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 다음에 보편화라고 하는 철학적 사유를 제시한 바울의 내용을 담은 “위대한 신앙 해석자 바울”이라는 챕터를 제시함으로서 보편성이라는 문화의 원류에 대한 이해와 이러한 문화가 어떻게 후에 기독교라는 보편적 신앙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설명해 주는 것이 더욱더 일목요연하게 보일 것이다. 결국 엮자는 이러한 역사 흐름의 연계성을 무시한 채 흥미유발에 급급한 나머지 책 전반의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해야 한다는 기존의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참신성과 흥미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객관성이 결여되어있다고 해서 이 책 모두가 거짓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쓴 만큼 그들의 주장과 논거에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논리적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만큼 역사적 서술에 있어서 객관성이라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각의 독특함과 명료함이 지나쳐서 객관성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부분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이 아쉽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관련된 내용에서 기존의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보여준 소크라테스의 연설문은 플라톤에 의해 후에 각색된 것일 가능성이 크고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말더듬이었으며 웅변가보다는 논객에 가까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 시대에는 모든 재판과정이 구두로 진행되었고 지금과 같은 속기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이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추측이 100% 옳다고 증명할 길도 없는 것이다. 즉 추측은 추측에 불과할 뿐 그 어떤 것도 증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쓴 변명에서는 분명하게 글로써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피력하고 있다. 이렇게 분명하게 남아있는 증거인 문서를 부정하고 그 시대의 상황적인 개괄을 통해 이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사실인양 역사적 서술을 한다면 과연 그러한 서술에서 객관성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 서술이 스포츠 신문의 ‘OOO군, XXX양 열애설’ 기사의 내용에 등장하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출국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사귀는 것이 분명하다’ 라는 식의 근거제시와 과연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싶다.
역사는 객관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사료에 바탕을 두고 기술을 해야 한다. 물론 문서상의 사료 또한 사람에 의해 윤색되고 각색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이나 환경이 기존의 남아있는 명백한 자료를 뒤엎어 버리는 식의 역사연구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는 마치 삼국시대 유적에서 치즈나 버터가 나왔다고 해서 기존의 역사 서술 사료의 내용을 부정하고 이 곳이 삼국시대에 미국 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친 흥미위주의 서술과 상황에 충실한 역사 서술은 자칫 역사 서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객관성의 결여와 설득력 부족으로 빠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지식전달이냐 흥미유발이냐’라는 큰 틀을 바탕으로 흥미위주의 역사서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폐해에 관해서 “호메로스에서 돈키호테”라는 책을 통해 알아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흥미위주의 역사서술과 참신한 역사 해석을 바탕으로 하는 종류의 책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서론에서도 밝혔지만 국내 서양학계가 대중으로부터 점차 멀어져가고 외면당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러한 류의 책을 보급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분명히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필요하다고 해서 무분별하게 받아들인다면 위에서 제시한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더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고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친 흥미위주의 서술을 지양하고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책을 선정하며, 또한 독자들 스스로도 비판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는 역사관을 심어주는 교육적인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