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한 교통, 사고 발생률 낮은 까닭

2007.02.05 14:19:00

지난 1월 필리핀을 여행하였다. 3박4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우리의 자연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많은 호기심을 자아냈다. 마닐라에서 머무는 동안 이질적인 문화에 대해 생소하기도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첨단 과학문명의 생활화는 요원하다는 생각도 했다. 일찍 유럽과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아 발달된 서구적인 문화생활을 할 것이라 믿었지만 전봇대 하나에 수백 개의 전선이 거미줄보다 빽빽하게 얽혀 있는 모습이나, 도심의 휴식공간인 공원에 벤치 하나 설치해 놓지 않은 점, 비싼 전기요금 때문에 어두운 실내와 거리의 모습들이 우리와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교통수단도 지하철, 승용차, 버스 중심의 우리나라와 너무 달랐다. 3-4인을 더 태울 수 있도록 개조한 자전거, 5-6명을 더 탈 수 있게 만든 오토바이, 지프차를 개조하여 십수 명이 탈 수 있게 만든 지포니, 추위가 없는 탓이겠지만 유리창 없는 낡은 버스 등이 승객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물론 택시도 있었지만 그 수효가 무척 적은 것 같았다. 도로의 차선이나 주차장의 주차라인이 잘 보이지 않았다. 페인트가 비싸서 선명하게 도색할 형편이 안 된다고도 했다.

시내 도로를 질주하는 온갖 교통수단들이 굉음을 질러대며 어딘가로 씽씽 달리고 있다. 복잡한 도로사정으로 제 속도를 낼 수는 없다. 차도를 건너는 사람들도 심각한 교통방해가 되고 있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 교차로에서 진입하지 않을 것 같은 차량의 진입, 회전 등 무질서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는 역주행까지도 가능하고, 사설경찰의 호위를 받으면 신호등 정도는 무시하고 목적지까지 갈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교통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필리핀 사람들 특유의 양보심이다. 느닷없이 끼어들어도, 무단 횡단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체되어도, 약간은 차량끼리 접촉되어 흠집이 생겨도 경음기를 눌러대거나 욕설을 퍼부어대거나 큰소리치며 서로 잘했다고 싸우거나 사소한 흠집을 변상시키려 하지 않는단다. 따뜻한 나라 사람들의 여유 있는 삶, 각박한 세상에서 바둥거리지 않아도 먹고사는 문제의 어려움이 없어서일까. 복잡한 도로에서 경음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그만큼 서로서로 양보하기 때문이다.

혼잡한 교통사정으로 항상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도 조급해 하지 않는 인간존중의 사회에서는 질서를 잘 지키는 것 못지않게 사고 발생률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통규칙을 잘 지켜야 되는 준법의식은 흐리지만 양보할 줄 알고 참을 줄 알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들의 정서 때문에 오히려 안전할 수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하고 있다.

선진국의 대열에 끼어들었다는 우리, 질서를 잘 지키는 우리, 의식수준이 선진화 되고, 고도의 문화생활을 하는 우리, 국가적 사회적 모든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 우리,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누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타인을 배려하고, 남의 실수를 용서하고, 조급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양보하는 미덕을 생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학구 김제 부용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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