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인 8일이 우리학교는 효경방학이었다. 홀로 문의문화재단지를 둘러보고 학교에서 바라보이는 양성산을 거쳐 작두산에 올랐다. 작두산 정상의 땡볕에서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고 있는데 공문을 본 선후배들이 기쁜 소식이라며 소식을 전해왔다.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교육부총리상을 받게 되었다. 추천서가 교육청으로 나갔지만 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축하받는 게 오히려 쑥스러웠다. 뒤늦게나마 관리자와 동료들을 잘 만나 교육부총리상을 받게 되니 놓친 고기가 더 크게 느껴지는 심정으로 교육계에서 나와 인연을 멀리 했던 상들을 생각해본다.
초임시절부터 상이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아이들을 지도해 도교육청 이상의 기관에서 주최하는 대회에 3위 이내로 입상시킨 교사에게 연말에 교육장상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요즘처럼 정보가 빠르거나 문화교류가 원활히 이뤄지는 시절이 아니라 최고 오지였던 단양군의 어린이들이 대회에서 상위입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단양교육을 활성화시키려고 교육장이 내세운 게 교사들이 개인적으로 도 단위이상의 대회에서 입상해도 교육장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해에 열린 도 대회 100m에서 3위를 했으니 당연히 교육장상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연말 교육장상 수상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후에 알았지만 유난히 독선적이었던 교감에게 바른 소리를 한 게 수상에서 제외된 이유였다. 교감이 의도적으로 상을 못 주게 한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예나 지금이나 관리자들에게 바른 소리를 잘한다. 한동안 이 올바른 소리 때문에 요주의 인물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관리자들에게 인계되었다는 것도 안다.
청원군이 충북에서 학교 수가 가장 많았던 시절의 얘기다. 바로 전해에 교육부(그 당시는 문교부) 지정학교를 해 체육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학교로 6월 달에 중간발령을 받아 육상부를 맡았다. 선수도 없었고 학부모들이 운동부에 선발되는 것을 반대해 육상지도를 하기에 여건이 나쁜 학교였다.
아이들이 열심히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며 소질 있는 아이의 부모를 직접 집으로 찾아가 설득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꾸러기들이 많았지만 아이들은 나를 잘 따르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 덕에 꼭 1년 후에 열린 교육장기 육상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사실 학부모뿐만 아니라 관리자들마저 육상대회에 관심이 없었다. 우승을 생각해본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아이들과 대회에 참석할 때만 해도 분위기가 썰렁했다. 그런데 오후에는 달랐다. 오전 경기에서 우승이 확정될 만큼 2위 팀과 점수차가 벌어지자 학부모 대표들과 교사들이 속속 대회장에 도착했다.
오죽 기뻤으면 선수들과 대회장에 온 사람들이 우승기를 차에 싣고 청주시가지로 나가 카퍼레이드까지 했다. 하필이면 데모대와 경찰이 대치 중이고 최루탄가스가 난무하는 시가지로 들어가 모두 눈물을 흘렸지만 멋진 추억거리였다.
그날 아이들은 불고기를 실컷 먹었다. 돈도 아깝지 않아 서로 음식이나 술을 사겠다고 나설 만큼 학교, 학부모, 동문 모두가 기분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날의 발언 때문에 또 한번 쓴맛을 봐야 했다.
몇 번 사양을 했건만 우승시킨 교사에게 꼭 한마디 들어야 한다며 끝 무렵 굳이 발언권을 준 게 문제였다. ‘평소 연습할 때 자장면이라도 자주 먹어야 하는데 오늘 하루만 저렇게 잘 먹으니 배탈 날까 걱정 된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냥 앞으로 이렇게 해줬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부모들 앞에서 자기를 망신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말이라며 내가 없는 자리에서 교장이 울분을 삭였다고 선배는 사과할 것을 권유했다.
그 당시는 교육장기 육상대회가 1년 동안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각종 대회에서 가장 비중이 큰 대회였다. 또 교육장기 육상대회를 우승시킨 교사들은 교육감상을 받는 게 관례였다. 끝까지 고집을 피웠으니 우승을 시켰지만 교육장상 하나 줄 리 없었다.
초등학교 여자 배구팀을 지도할 때 교육부총리상을 탈 기회가 있었다. 근무기간이 4년인 시내학교지만 정말 열심히 5년을 근무했다. 어머님을 모시고 다섯 식구가 살기에도 좁은 아파트였지만 집이 먼 선수 2명을 우리 집으로 데려와 밤늦게까지 훈련을 시켰다.
당시 전국에서 최강팀이었지만 우승을 한 번도 못시켰다. 2번의 결승전과 1번의 준결승전에서 2:1 박빙의 경기를 펼친 선수들에게 지금까지 미안해하는 부분이다. 냉정하게 등수를 가리는 스포츠 세계라 지도자들에게 주는 시상에도 철저히 원칙이 적용된다. 시ㆍ도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소년체육대회 이외의 다른 전국대회는 아무리 좋은 성적을 올려도 인정받지 못한다.
지도교사가 교육부총리상을 받으려면 선수들이 소년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이나 은메달을 따야한다. 그해 소년체육대회의 준결승전을 못내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 우리 팀과 겨룰만한 팀은 서울에 있는 팀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중요한 소년체육대회의 길목에서 만났다.
초등학교의 배구경기는 흐름경기라 13:1로 이기다가도 심판이 휘슬을 두 번만 불면 15:13으로 승패가 뒤집힌다. 1세트 7:1까지 앞서가자 심판들이 경기의 흐름을 끊었다. 누가 봐도 우리가 이길 경기였고,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하지만 소년체육대회마저 심판들의 입김에 놀아나니 이길 방법이 없었다. 2:1로 패하자 금메달이 날아갔다는 서운함에 관리자들은 동메달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선수들이 동메달을 딴 대가로 교육감상을 받았다. 단체경기는 전국대회에서 입상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월을 거꾸로 돌려놓고 똑같은 상황을 맞이한다면 지금은 그만큼의 열정을 보일 자신이 없다.
사실 학교에서 운동지도를 해본 사람이라면 개인경기보다 단체경기의 지도교사가 훨씬 더 고생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개인전에서 금ㆍ은메달을 딴 선수의 지도교사는 교육부총리상,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선수의 지도교사는 교육감상을 준다. 교육계에서 가장 강조하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다.
운동지도를 하지 않으니 여유시간이 많았다. 교육계에서는 상복이 없었지만 여기저기 참여하며 외부 기관에서 주는 상을 여러 번 받았다. 이정표를 사진자료로 만들어 충북의 관광지를 쉽게 찾아오는 방법이 도민제안으로 채택되고, 충북에서 열린 전국체전 개ㆍ폐회식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고, 도청 홈페이지에 꾸준히 충북의 관광지를 소개한 공로를 인정받는 등 도지사 표창을 3번이나 받았다.
방학도 없이 운동지도를 하던 시절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지만 전국의 유명관광지나 문화재를 사진자료로 남기겠다는 야무진 꿈을 실천하느라 여행지를 즐겨 찾는다. 그 덕에 우리나라의 여행기 공모전 중 최고라는 한국도로공사 여행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로 입상도 했다.
그래도 내게는 교육계에서 주는 상이 더 소중하다. 교사에게 주는 상은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라는 채찍이라고 생각한다. 받은 것이 많은데 전화로, 메일로, 눈빛으로 상 받는 것을 축하해 준 직원들과 선ㆍ후배,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했다.
공로를 인정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게 상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으로 받았더라도 상이 좋기는 좋다. 상장도 받기 전에 몇 명이 늦게까지 술을 사줬다. 상을 받고 술을 얻어먹었으니 또 빚을 졌다.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을 더 열심히 가르치고 아이들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