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의 부실이 청소년의 인성교육의 부실로 이어지고 인성교육의 부실은 기성세대들의 신세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원에서 교복을 입은 채로 성행각을 벌리는 장면이 인터넷으로 떠돌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거리에서 고교생들이 남녀끼리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 도를 넘어서는 행위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게 한다는 데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가정에서 잠재되어 습관화되는 인성교육은 공동체의 의식을 펼쳐가는 데 초석이 된다. 그러기에 학교를 떠난 거리에서도 도덕적 인간으로서 양식있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나아가서는 웃어른들을 보고도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바른 성교육이 바른 인간다움을 형성시킨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정화시킬 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성교육, 전교사 전천후 교육으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시간에 성교육을 배우는 시간이 있는냐고 물어보면 없어요 하는 소리를 예사로 듣는다. 성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많은 시기에 성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교육과정에 새로운 안이 필요한 것 같다. 대학의 성강좌에 대학생이 우르르 모여드는 현상. 이것이 참교육의 진실을 보여주는 성교육의 실체일까? 그래도 살아갈만 하다는 나라에서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공원에서 추태를 보이는 장면을 인터넷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조차 든다. 성에 대한 관심만 많고 성에 대한 실체를 모른 채 방관하는 가운데 성의 왜곡된 인식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비뚤어져 가는 모습을 비춰줄 따름이다.
교사가 성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은 성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학생들이 UCC 동영상을 보면서 비키니 입은 여성의 모습에 시선을 모우는 남학생들. 그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라고는 하나 성(性)과 성(聖)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무조건 남성은 여성을 쫓아가고 여성은 남성의 매력에 이끌리는 방관된 태도는 교육자의 책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성에 대한 교육이 무엇인지 생물학적으로 과학시간에 설명할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보편화되어 있는 그런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성에 대한 진지한 토론으로 성에 대한 자신만의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정도를 제대로 학생들에게 입력시키지도 못하고 그저 지나가는 수업시간의 이야기 정도에 머무르고 있는 오늘의 청소년들의 성교육에는 특별활동을 통해서라도 성교육에 대한 시간 안배가 절실하다고 본다.
성교는 밥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이것에 이끌리기 시작하면 그것은 끝없는 충동으로 발전하여 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처음에는 맛을 모르다가 계속 피우면 그것에 중독돼 피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성충동도 계속 솟구치는 힘의 억제를 학업으로 운동으로 소모해 내지 않으면 옆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는 힘들어진다. 그러기에 첫경험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길에 매진하도록 하는 양상으로 나아갈 것을 권장하는 것도 성이 주는 오묘함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다.
성교육 입체화를 통한 자기 책임을
성이라고 하는 것을 아직도 은익되어 말하여야 한다고 하는 인식이 기성세대에게는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특히 유교가 지배하고 있는 형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예의범절 속에 음이라고 하는 것은 과히 양반으로서는 쉽게 뱉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왔던 한국인의 전통이 바로 성교육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억설은 아닌 듯 싶다. 그러기에 성교육에 대한 자료는 있으나 그것을 누구에게나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정도로 보편화시키지 않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닌 지.
스웨덴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성교육을 시킬 때 성교는 아무 곳에서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성은 인간으로서 충족되어야 할 요소이지만 그 충족은 아무 곳에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함을 제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