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이름은 정체성도 살린다

2011.10.12 15:32:00

서울 한강에서 자전거를 이용해 인천 앞바다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2009년 시작된 경인(京仁) 아라뱃길의 공사가 마무리돼 개통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강 자전거길 이용자가 10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경인 아라뱃길이 한강 자전거길과 연결되면 자전거길 이용자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는 보도다.

이처럼 최근 4대강 사업과 관련하여 언론에 ‘아라뱃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에 대한 정식 명칭은 ‘경인 아라뱃길’이다. 이는 원래 ‘경인 운하’였다. 한강 하류의 행주대교에서 서해(황해)로 연결되는 운하다. 한국수자원공사가 2009년 경인운하 이름을 공모해, ‘경인 아래뱃길’을 새 이름으로 확정했다. 짐작이 가겠지만 ‘아라’는 우리 민족의 대표 민요인 아리랑의 후렴구 ‘아라리요’에서 따온 표현이다. 따라서 운하의 새 이름은 민족의 멋과 얼, 그리고 정서와 문화가 흘러가는 뱃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를 나타내는 민요에서 뱃길의 이름을 지었다는 데서 흥미가 있고, 의미도 깊다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정착 뱃길 사업을 담당하는 한국수자원공사는 회사의 명칭을 영어 표기인 ‘K-water’로 변경했다. 한쪽에서는 우리말 표기를 강조하면서 정작 회사 명칭은 근본도 의미도 알 수 없는 영어로 표기하고 있다.
 
이런 것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한국통신도 말없이 KT로 바꿨다. 우리 민족의 추억과 애환을 함께 했던 한국철도도 코레일이 되었고, 고속철도는 KTX이다. 담배인삼공사는 생소한 KT&G이가 되었다. 국민은행은 주택은행과 합병하면서 광고나 간판에 사용하는 회사 이름을 KB로 바꿨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한글 단체에서 제동을 걸고 나선 적이 있다. 국어문화운동 등 한글 단체들은 특정 업체가 영어만 사용하는 광고 전략을 써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끼쳤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당시 법원은 일부 회사가 옥외광고물 관리법시행령에 있는 한글을 함께 쓰도록 한 조항을 위반한 것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법에 따르면 한글 병기 위반은 벌금이나 과태료를 부과하는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판결 내용을 더 살펴보면, 지방자치단체가 시정 명령 정도는 내릴 수 있지만 이것 역시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또, 우리말의 중요성만 강조해 외국어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엄격하게 제한하면 지나친 국수주의에 기초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위헌 소지도 있다고 덧붙였다.

회사 이름을 영어식으로 변경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제화와 세계화의 흐름에 대한 부응이라고 한다. 아울러 첨단 기업의 이미지를 풍기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사명에 굳이 영어를 넣어야 국제 경쟁력이 생긴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회사의 영어 이름은 회사의 정체성이 희박해지기도 한다. 서울지하철공사나 서울도시개발공사는 회사의 상호만 보아도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서울메트로나 SH공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담배인상공사, 한국수자원공사 등은 이름에 회사 업무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지만, 영어 이름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뚜렷하지 않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말을 버리고 영어 표기를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국제 경쟁력과 직접 관련이 없는 골목길에 있는 가게도 영어 간판을 즐겨 쓴다. 세탁소는 클리닝(이를 크리닝이라고 쓰고 있는 곳이 많은데, 외래어 표기를 잘못 쓴 것이다.), 미장원은 헤어컷, 포장 배달은 테이크아웃이라고 한다. 청소년들이 즐겨 듣는 노래 가사도 영어가 넘쳐난다. 영어 유치원은 비싼 학비에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다.

극단적인 현상은 언제나 위험하다. 국제화 시대라고 무턱대고 영어로 표기하는 의식은 바꿔야 한다. 그리고 상호나 회사명을 영어로 바꾸는 세계화보다 내실을 기하는 세계화가 필요하다. 제품의 질은 상승하지 않는데 이름만 영어 표기를 한다고 제품이 세계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 기업임을 알리는 우리말 표현이 차별성을 얻을 수 있다. 영어 이름과 함께 한글을 나란히 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공기업은 말 그대로 공적인 기업으로 사회에 공헌을 해야 할 부분도 있다. 공헌 내용에 대해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할 때이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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