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점점 더 편리하게 해주고 있다.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먼 길도 걸어서 다닐 수밖에 없었다.
50여 년 전 초등학교 6학년 때 걸어서 괴산 댐을 지나 송면의 부잣집 민가에서 1박을 하고 속리산을 넘어서 법주사로 수학여행을 갔던 기억이 새롭다. 돌아올 때는 보은에서 괴산까지 버스를 타고 왔을 뿐 도보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요즘 학생들은 도보수학여행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당시 어른들이 5일장에 가려면 50여리 길을 걸어서 장을 보고 다시 걸어서 왔다. 갈 때에는 농산물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갔고, 장을 보고 돌아올때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등에 지고 높은 고개를 넘어왔다. 학생들도 20여 리 길을 걸어서 통학을 하였다.
당시는 모두가 가난했고 교통수단이 없어서 당연한 것으로 알고 불평불만도 없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걸었다. 학생들은 양식이 없어 도시락도 못 가져갔고, 어른들은 점심을 굶고 100여 리가 떨어진 장을 다녀왔다.
땔감 연료로 산에서 나무를 베어서 사용했고 전기가 없어 호롱 불을 밝혔다. 수도가 없어 먼 곳의 물을 길어다 먹었고 추운 겨울에도 냇가의 얼음을 깨고 호호 손을 불어가며 빨래를 하였다. 60대 이상은 대부분 이렇게 불편한 생활을 하며 살았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모두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생활은 향상되었고 문명이 발전하여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얼마나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1㎞만 넘어도 차를 타고 간다. 하루를 걸어서 생필품을 구입하였는데 차로 대형마트에 가서 카트에 물건을 담아 계산대를 나오면 자가용에 짐을 싣고 엘리베이터로 짐을 운반한다. 가까운 거리의 현장학습도 버스를 이용하고 밝은 전등 아래서 문화생활을 즐기며 살게 되었다.
TV, 냉장고, 온난방기, 레인지, 전기청소기 등 가전제품으로 너무 생활이 편리해졌다. 공중전화와 집 전화는 용도가 폐기되다 시피 되었고, 개인별로 손전화가 있어 지구촌의 시시각각 변화를 검색하며 문자는 물론 영상통화까지 하며 소통하는 편리함의 극치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육체적 노동을 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농기계를 사용하여 편리하게 농사를 짓고 있다. 예전엔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걸어 다녔기 때문에 별도로 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요즘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걸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돈을 주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며 체중관리를 해야 한다. 보릿고개라고 불리는 춘궁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영양과잉으로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주거형태도 초가에서 단독주택이 많았는데 읍·면 단위까지 아파트가 늘어나 점점 핵가족으로 나눠져 살고 있다. 이웃 간에 정이 많은 농촌에서는 담 너머로 음식을 나눠 먹고, 이웃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정을 나누며 살았다. 도시의 아파트는 아래위층에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다. 노인들은 비밀번호를 모르니 바깥출입도 자유롭지 않다. 아파트 이름은 모두 영어로 지어서 쉽게 잊어버리고 꼬부랑말이라 발음도 잘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편리해졌고 잘 살게 되었고 더 오래 살게 되었는데 현대인들은 과연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노인층의 어른들께서는 가난했지만 가족과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절이 사람의 본성(本性)대로 살았던 것 같다. 편리하고 풍요로운 물질문명으로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고 있지만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국민의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노후에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할 어르신들의 황혼이혼이 늘고 있다니 어찌 된 일인가? 자녀들과 떨어져서 살아가고 있으니 어릴 때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전화라도 자주해서 안부를 물으면 외롭지는 않겠지만 도리어 부모가 자식들의 안부를 걱정하며 전화를 한다. 가정의 애경사가 있을 때도 혼인식장이나 장례식장에서 잠깐 만나면 각자 일터로 가기에 바쁘다. 사람이 편리하게 살기 위해 발명한 물질문명이라는 괴물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소외되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이라는 생각을 하니 세모(歲暮)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