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댄스스포츠를 배웠다. 그때 배운 댄스가 자이브와 왈츠였다. 여름방학 교원동아리 연수에 참가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나이 들어 하는 운동을 위해 시작했다. 하지만 젊은 선생님 따라 하기도 버거웠다. ‘내 몸은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들도 따라 하기 버거울까?’ 그만 둬야 하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리고 따라주지 않는 몸에 대한 열등감도 느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틈틈이 노력하고 연수에 빠지지 않았다. 그 결과 미흡하나마 어울릴 수 있었다. 이후 나는 금요 댄스 동아리에 참가하여 용인시장배 왈츠대회에도 나갔다. 물론 팀과 함께 나간 것이다. 당시 용인시장배 댄스스포츠 대회는 전국대회로 프로와 아마추어 부로 구분하여 운영했다. 댄스 스포츠 생활화를 위해 아마추어 댄서에게도 발표 기회를 준 것이다. 나는 이 대회 아마추어 자이브 부분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요즘도 나는 매주 금요 댄스 동아리에서 세 시간씩 운동을 한다. 우리 동아리에는 교원, 일반인 등이 섞여 있다. 그 중에는 은퇴자들도 있고 사업하는 사람, 대학 강단에 나가는 사람 등 다양한 계층으로 이뤄졌다. 그 중에는 70이 넘은 부부도 있다. 나이든 부부가 함께 춤추는 것이 퍽 멋있게 보여 닮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동아리에서 자이브(Jive), 룸바(Rumba), 차차차(Cha Cha Cha) 등의 라틴 댄스, 그리고 왈츠(Waltz), 탱고(Tango) 등을 배웠다. 이렇게 많은 댄스들은 배우고 잊고를 반복한다. 하지만 나는 동아리 회원이 하는 댄스 동작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제법 많은 성장을 했다. 포기할 생각까지 하던 댄스,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 대한 열등감을 이제는 극복하여 즐기게 된 것이다.
공자님 말씀에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란 가르침이 나의 댄스 스포츠에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공자님 말씀 가운데 ‘習’자를 가장 좋아한다. 익힐 습(習)자는 깃우(羽)자와 흰백(白)자의 합작이다. 즉 흰 새(白)가 끊임없이 펄떡거리며 날갯짓(羽)하는 모양을 그린 글자이다. 흰 새란 자라지 못한 사람(白面書生)인 어린 새를 지칭한다. 어린 새가 마음대로 날갯짓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
그런데 사회에는 습(習)자를 게을리 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생각, 어떻게 하던지 점수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족집게 과외나 학원은 점수 조급증을 채워주기 위한 곳으로 습(習)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습(習)자는 느리지만 위대하다. ‘모든 위대한 업적은 한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는 말콤 글래드웰 (Malcolm Gladwell)의 말을 되새겨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당장 결과를 봐야만 하는 조급증 환자들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머리로만 익힌다. 그 결과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로 익히는 것보다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리고 바른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몸으로 익히는 것보다 마음으로 익혀야 한다.
아는 것은 많은데 행동은 배우지 못한 사람과 별다르지 않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런 지도자를 험담하고 따라주지 않는 것 또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으려면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 그것은 어쩌면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만 시간의 법칙을 거슬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기억하는 것은 잘 되는데 실천하지 않는 사회로 된 것은 점수로만 평가하는 사회로 만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