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강원도에 대한 지리적인 평판은 좋은 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 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의 사위인 나학천(羅鶴天)은 조선팔도의 형상을 인체와 동물에 비유하여 인물평을 하였는데 그중 강원도와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를 인체에 비유하면 갈빗대(脇) 모양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꿩이다. 강원도 사람은 자기거처에 가만히 있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蟄伏知短).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강원도는 산골짜기 백성으로 몹시 불손하다고 했다. 한편 조선 정조 때 규장각 학자인 윤행임은 강원도 사람을 평하기를 암하노불(岩下老佛)이라고 했다. 즉 바위 아래 앉아있는 부처님 격으로 누가 알아주던지 말든지 자기 할일은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강원도 인물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조선시대 지역 인물평은 많은 부분에서 학문적 성과와 관련이 있다. 택리지 팔도의 인물평에 경상도는 질실(質實)한 곳이라고 후한 점수를 준 것이 그 예이다. 경상도는 고려조부터 과거 급제한 관리를 많이 배출하고 서원과 향교가 많은 곳이다. 그 때문 후한 점수가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릉은 달랐다. 지명의 유래를 살펴봐도 그렇다. 강원도란 이름은 조선의 건국 초기 강릉과 원주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당시 태조는 조선을 8도로 나누고 강릉과 안동 두 곳에 대도호부라는 지위를 주었다. 이만큼 강릉을 중시하였다. 강릉에 대한 지역 호감도가 높았다. 그러면 조선 사람들은 왜 강릉을 중시하고 좋아했을까? 그것은 문향(文鄕)으로서 높은 점수를 얻은 것 같다. 즉 학문적 성과를 토대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강릉의 풍속을 칭찬한 사람은 송강 정철이다.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강릉에 자주 머물렀다. 그때 쓴 시가 관동별곡이다. ‘강릉대도호 풍속이 좋구나.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한 붉은 문(정문; 旌門)이 마을마다 널려 있고, 즐비하게 늘어선 집집마다 벼슬을 내릴만한 풍속이 좋던 요순시대 태평성대가 아직도 있단 말인가?’
강릉을 요순시대까지 칭찬한 것은 과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강릉은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강릉 출신 김시습과 이율곡과 같은 인물의 성품을 보면 지혜가 뛰어나고 불의를 이기지 못하며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강릉은 여성의 도시로 더욱 유명하다. 강릉하면 신사임당이 떠오른다. 그러나 강릉은 여류시인 허난설헌도 배출했다. 두 인물을 평가한다면 신사임당은 한국의 여성,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유명하고 허난설헌은 우리나라 규방문학(閨房文學)에 커다란 자취를 남겨 그의 글은 훗날 이웃 중국과 일본까지 알려졌다. 사임당이 한국의 여성이라면 허난설헌은 동양의 여성 문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