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미국의 한 시민이 아프리카 알제리 튀니스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31년이 지난 어느날 미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2월 유해를 실은 군함이 미국으로 입항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해를 맞으러 나갔다. 군악대의 연주, 예포가 울리고 대통령과 국무위원, 상원위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해를 맞이했다. 사람들의 애도와 묵념 속에 그의 유해는 워싱턴 DC로 이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현재도 미국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 가난한 미국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럼 무엇이 미국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만들었을까? 그가 작곡한 한 곡의 노래 때문이다. 노래 가사는 미국인에게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주었다.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 뿐이리
이 노래가 미국인의 마음에 감동을 준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을 하고 있었다. 남군과 북군은 워싱턴 시 인근 레파하녹크 강(rappahannock river)을 사이에 두고 밤낮 없이 밀고 당기는 전투를 했다. 전쟁은 지루하게 계속되고 병사들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군과 북군은 밤마다 음악회를 열기 시작했다. 음악회 시간만 되면 양군은 자기편 군악대가 울려 퍼지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그날 있었던 끔찍한 장면을 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전쟁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군인들은 더욱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군 진영에서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음악이 계속되더니 누군가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고 해도…’
음악을 듣던 북군의 병사 눈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집에 두고 온 부모 형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옆에서 이 모습을 본 병사들도 하나 둘 따라 불렀다. 잠시 뒤 남군의 진영도 군악대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북군의 군악대가 연주했던 노래다. 남군의 군악대에서 흘러나온 노래 가락은 남군과 북군 가리지 않고 모두 따라 부르게 만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노래 가락에 취해 강으로 뛰어들었다. 모습을 본 몇몇 병사들도 뛰어들었다. 그러자 다른 편의 병사들도 강으로 뛰어들어 삽시간에 모든 병사들이 뒤섞였다. 양군의 군대는 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물속에서 얼싸안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양군은 전쟁을 중단하고 하루 동안 휴전을 했다. 이 이야기가 퍼지자 남군과 북군은 전쟁을 계속 해야 하나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 노래는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더욱 유행하여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연회 때마다 부르게 했다고 한다. 이 노래가 남과 북, 전쟁의 상처와 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 작사자 ‘죤 하워드 페인’은 한평생 아내를 얻지도 않고 집에 가지도 못하고 떠돌았다고 한다. 존 하워드 페인은 1791년 보스톤(Boston)에서 출생하였다. 불우한 방랑자 페인은 20대에 영국에 가서 기자와 배우로 활약하다가 비숍 헨리가 작곡한 <밀라노의 아가씨 클라리> 오페라에 나온 노래 <즐거운 나의 집>에 가사를 붙이는 일을 맡았다. 작사자가 된 것이다.
<즐거운 나의 집 ; Home sweet home> 작사자 존 하워드 페인은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방랑자 시절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여 가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 되지 않아 이 노래가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페인은 가정도 없이 방황하였다. 그가 1851년 알제리에서 친구 C. E. 크라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의 글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상하다고 들릴지 모르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가정의 기쁨을 노래하지만 나 자신은 아직껏 내 집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냈소. 앞으로도 몸 둘 곳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할지 두렵다오.’
존 하워드 페인은 이 편지를 쓴 이듬해 50세를 일기로 튀니스 길가에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