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는 분실된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이었다

2015.11.05 13:23:00

점심을 먹고 난 뒤, 잠시나마 산책을 할 생각으로 교정을 거닐었다. 그런데 우연히 식당 옆 폐휴지 창고를 지나치다가 폐휴지 더미 사이로 낯익은 책 한권이 눈에 띠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교재였다.

이미 수업진도(修業進度)는 다 끝났지만 아직 기말고사가 남아 있는 터라 누군가가 이 책을 일부러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이 책의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분실하고 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 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폐휴지 더미에 묻혀있는 책을 얼른 집어 들었다.

우선 책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책 주인이 누군지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端緖)가 있는지 책의 겉표지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혹시 책 속에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며 살펴보기로 하였다. 페이지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필기가 잘 되어 있어 책 주인이 수업시간 얼마나 성실했는가를 엿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뒤 페이지로 갈수록 페이지가 깨끗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책 주인을 찾을만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 빈 여백에 적힌 응원문구("김○○, 수능대박 파이팅!")속 이름이 왠지 모르게 낯익어 보였다. 다행히 책 주인은 내가 가르치고 있는 3학년 모(某)반의 김○○였다. 평소 수업태도가 좋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아이였다.

잃어버린 책을 찾아 좋아할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곧장 녀석의 교실로 갔다. 교실은 점심시간이라 다소 어수선했지만 수능이 며칠 남지 않아서인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도 책상 위에 무언가를 꺼내놓고 열심히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녀석은 보고 있던 책을 얼른 감추었다. 그 순간, 가지고 온 책을 녀석의 책상 위에 불쑥 내밀며 말했다.

"이 책 네 것이지? 폐휴지 창고에서 찾았다."

녀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이 책 뭐예요? 며칠 전에 제가 버린 책인데…."

녀석의 말에 잠깐 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한참을 서있었다. 책을 찾아준 것에 고맙다는 말은커녕 버린 책이 다시 책상 위에 있다는 사실이 그리 반갑지 않은 듯 녀석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책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니? 기말고사가 아직 남았는데…."

녀석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 기말고사 포기했는데∼ 요."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녀석은 수시모집에 최종 합격하여 구태여 수능과 기말고사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며 배웠던 모든 책을 버렸다고 하였다. 그 이후, 수업시간 공부도 게을리 했고 기말고사대신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준비해 왔다고 하였다. 이제야 녀석의 책이 갈수록 깨끗해져 있는 것과 보고 있던 책을 얼른 감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책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 책을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기말고사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는 터라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조언하며 책을 돌려주었다.

"○○아, 대학에 합격했다고 해서 기말고사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네~에."

녀석이 '네'라고 대답은 했지만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모른다. 대부분의 학교가 수능이 끝나자마자 바로 기말고사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시모집에 합격했다고 학교의 중요 시험인 기말고사를 포기하는 요즘 아이들도 문제지만, 현행 잘못된 입시제도의 부작용 탓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함이 감돌았다.
김환희 강릉문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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