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 페르세폴리스

2006.05.01 09:00:00

고대 아시아의 중심이었던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옛 영광을 떠올려 보자.



글·사진 | 박하선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찬란한 문화
이슬람 공화국 '이란' 역사는 자그로스(Zagros) 산맥을 중심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지만, 문명이라고 부를만한 형태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신바빌로니아와 협력하여 앗시리아를 멸망시킨 메디아(Media)왕국, 그리고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던 아케메네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역사 속에 굵은 획을 긋게 되고, 그 찬란했던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의연하게 당시의 위용을 말해주고 있다. 그 문화의 향기를 찾아 남부에 있는 고도 '시라즈(Shiraz)'를 찾는다.

"5월에 시라즈를 방문하는 사람은 고향이 어디인지조차 잊을 것이다" 라고 극찬했던 유명한 시인 '사디(Sadi)'의 말이 전해지는 곳, 시라즈. 이곳은 잔드(Zand) 왕조가 페르시아를 다스리던 1753년부터 1794년까지 이 나라의 수도였다. 그러나 시라즈를 이란에서도 손꼽히는 문화도시로 만든 것은 진정 잔드 시대의 유물이 아니다. 기원 전에 벌써 한 시대를 주름잡고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드높였던 곳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라는 엄청난 유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수도'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다. 현지에서는 '다그테잠시드(Takht-e Jamshid)'라 불리는 이곳은 시라즈 시내에서도 50여㎞ 더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과거 페르시아 제국 최고의 영광이 서려있는 현장으로 가는데 있어서 이 정도 거리쯤이 무슨 걸림돌이 되겠는가. 새벽길을 달렸다. 이왕이면 유적지 안에서 동이 터 오고, 불덩이 같은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도착해서였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들여 보내주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아직 개장 시각이 되지 않았다. 시라즈에 있는 문화재 관리국에서 특별 발급해 준 허가서를 내밀고도 통사정을 해서야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돌멩이 나도 고고학적 가치 지녀
기원전 700년부터 330년까지 고대 페르시아를 다스렸던 아케메네스 왕조의 봄 궁전으로 건축된 이 페르세폴리스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문화재관리국의 보호 아래 놓인 다른 유적지들과는 달리 현재 이곳은 군인들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는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도난 사고를 방지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이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고학적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성벽처럼 둘러싸인 벽면을 따라 나있는 넓은 돌계단을 오르니 그 옛날 페르시아 제국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기원전 518년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을 처음 명령한 왕은 '다리우스(Darius) 1세'였다.

당시 아르메니아인들은 여름 궁전을 하그마탄(지금의 하마단)에, 겨울 궁전을 수사(Susa)에 두고 있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봄 궁전이자 새해 첫 날인 3월 21일에 벌어지는 '노르즈(Now Rouz)' 축제를 치르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총면적이 12만5000㎡에 달하는 페르세폴리스를 짓는 대공사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공격했던 기원전 330년까지도 끝이 나지 않았었다. 강한 지진이나 홍수 등 어떠한 천재지변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진 이곳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파괴하지만 않았다면 오늘날까지도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광풍에 사라진 세계의 문
아르메니아인들은 페르세폴리스를 짓기 위해 이집트, 그리스, 앗시리아 등 여러 나라의 문화를 복합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민족의 문화를 그대로 베끼지는 않고 자신들의 고유문화와 적절히 조화시켜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페르세폴리스에서 특정 문화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그리스 신화 속의 괴물 켄타우로스의 모습이 거대하게 새겨진 출입구를 비롯해 대기실, 접견실, 100개의 기둥이 있는 방, 1.5㎞에 달하는 지하수로 등으로 엄청난 규모와 시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도처에서 만나게 되는 조각상들마다 섬세하기 그지없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특히 노루즈 축제 때 다리우스 왕에게 선물을 바치러 온 23개국 사신들의 조각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다. 계단 양쪽에 새겨진 조각들이 사신들의 출신 지역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크게 구분되는 있는데, 그들의 복장과 공물로 가져온 선물들이 아주 다양하다. 당시 이 페르세폴리스는 지구상에 전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들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의 문물이 화려한 조각과 거대한 기둥들로 떠 받혀 있는 '전 세계의 문'을 통하여 유입되면서 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그러다 보니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페리세폴리스의 운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더의 광풍에 견뎌낸 세력은 없었다.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더는 이 놀라운 아시아의 번성을 감당할 없었기에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전군을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 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결국 죽음 직전 포로가 된다. 부하의 배반으로 온몸이 칼에 찔린 아시아의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한 병사의 눈에 발견된 것이다. 포로로 잡힌 다리우스 3세는 그 병사로부터 한 모금의 물을 받아 마신 후, 조용히 눈을 감는다. 기원 전 330년 7월, 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대 페르시아의 제국도, 그 수도였던 화려한 페르세폴리스도 이렇게 하여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 갔다.

되살아나는 고대 아시아의 자존심
1931년부터 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 고고학팀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페르세폴리스의 역사적 의미는 되살아났다. 근처에 있는 왕들의 무덤군 '나그쉐로스탐'을 찾아가면서 이곳 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쳐 온 '후세인 카시프'는 말한다. "원래 이 페르세폴리스의 건물들에는 500여 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17세기 사파비드 왕조 때 만 해도 약 40개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죠. 그러나 현재는 그 수가 더 줄어서 남아있는 것은 13개 뿐 입니다." 긴 세월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했던가. 그나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다음부터 발굴과 복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이란다.

고도 1500m의 황량한 평원에 쏟아지는 불볕아래 펼쳐지는 폐허의 잔해에 묻히고, 잊혀버린 페르시아 제국의 위용을 떠올려 보면서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 그 숨결을 느껴보다 보니 어느 덧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페르세폴리스.' 새교육 5월호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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