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주요 키워드는 〈삼국지〉일 것이다. 중국의 4대 기서(奇書) 가운데 첫 순위를 차지하는 대하 '전쟁역사소설(戰爭歷史小說)'인데, 시대적 무대는 농민들이 중심이 된 민중봉기(황건의 난)가 일어난 서기 184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백성들의 반 정권 투쟁 황건의 난
현대 중국에서는 황건의 난, 즉 머리에 누런 천을 쓴 비적 떼가 난리를 쳤다는 뜻이 아니라 '황건기의(黃巾起義)'라는 표현을 쓴다. 단순히 그들을 도적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기 위한 혁명세력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원래 광무제 유수로부터 시작되는 후한(後漢)은 처음부터 중앙집권적 정부가 아니라 호족 연합정권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커져버린 지방의 호족들은 본격적인 권력집단으로 성장함으로써 문벌귀족으로 발전해갔다. 후한 말도 역시 전한(前漢)과 마찬가지로 연이은 어린 황제의 즉위로 태후를 비롯한 외척과 환관들이 세상물정을 모르는 황제를 둘러싸고 정치를 농락했다.
결국 국가의 기간산업인 농업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 걸친 침체를 가져왔으며 백성들은 수입격감에 조정의 중과세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배고픔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인심은 흉흉해지고 도적 떼가 들끓어 비적화(匪賊化)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백성들로 하여금 '몽땅 다 바꿔버리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이때에 '태평도(太平道)'가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많은 반란 중에 특히 농민 반란군은 국가의 체제 자체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조선말에 동학혁명군이 봉기하자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까지 끌어들여 결사적으로 진압코자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삼국으로 다시 분열된 중국 대륙
후한 중기부터 마그마처럼 끓고 있었던 백성들의 반 정권 투쟁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한 장각(張角)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당시 다수의 유민(流民)들을 끌어 모으는데 성공하여 불과 10여 년 사이에 수십만의 신도를 끌어 모아 종교집단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집단으로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를 대현양사(大賢良師)라 칭하고 거사에 즈음해서는 자신은 천공장군(天公將軍), 동생인 장보와 장량을 각각 지공장군(地公將軍)과 인공장군(人公將軍)으로 삼고 총 병력 36만에 달하는 황건군(黃巾軍)을 조직하였다. 중국민중의 눈에 황제라는 존재는 하늘의 위임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타도의 대상일 뿐이며 이를 대신하여 새로이 덕이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有道伐無道, 無德讓有德)는 상황논리가 크게 작용하여, 진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던 '진승·오광의 난'처럼 이번에는 후한 멸망의 도화선, 황건의 난이 터진 것이다.
의외로 강적을 만난 후한의 외척들은 모든 힘을 동원하여 반란군 진압에 나섰으며 자체적인 방어능력이 없었던 중앙정부는 각 지역에 황제의 이름으로 황건적 토벌을 위한 격문을 보내니 호족들은 황명에 따른다는 구실로 군비를 강화하고 자기의 사병조직을 총동원하여 영지방어에 나섰다. 이 때 유비(劉備)도 관우, 장비와 도원의 결의를 맺고 의병을 조직하여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자칭 대현양사(大賢良師) 장각이 죽자 황건의 난을 주도했던 지도자급들은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나 혁명적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지방의 호족들이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되어 '대업(大業)'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제후들은 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집권을 계기로 천자를 능멸하는 역적을 친다는 구실로 중원의 패권다툼을 하다가 최후의 승자인 조조(曹操)가 위왕(魏王)에 오르고, 서기 220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계속 헌제를 협박하여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황제 위에 오름으로써 기원전 202년부터 시작된 한나라는 문을 닫게 되었다.
한편 유비는 한조(漢朝)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대파한 여세를 몰아 서천지방을 중심으로 촉(蜀)을 세우고 후한이 망한 후에 제위에 올랐으며(서기 221년), 손권(孫權)은 강남을 중심으로 그 지역의 호족들을 규합하여 유비와 함께 조조의 남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오(吳)를 세우고 한조가 망하자 위와 촉한에 비해 뒤늦게 황제에 올랐다(서기 229년). 이로써 중국대륙은 삼국분립시대(AD 220~280)로 들어가게 되었다.
과장과 왜곡의 역사서술 〈삼국지〉
원래 삼국지(三國志)는 삼국시대의 촉(蜀)과 그리고 그 이후 서진(西晋) 조정에서 봉직한 진수(陳壽)가 삼국시대를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위지(魏志)·촉지(蜀志)·오지(吳志)를 총 65권으로 정리하였는데, 그는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위지에 본기(本紀)를 넣어 역사서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조조의 위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승자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이후 사마염이 조 씨의 위를 멸하고 오나라까지 병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지만 중국은 다시 대혼란에 빠져드는데, 이를 남북조 시대라 한다. 남북조 가운데 송나라(조광윤의 송나라가 아님)의 문제는 배송지에게 역사서로서 진수의 <삼국지>에 해설을 달라는 황명을 내려 본문보다 엄청나게 방대한 소설체 주석이 달렸으며, 한족의 남조(南朝) 국가들은 〈삼국지〉의 주인공들 이야기 가운데 재미있고 과장되며 엽기적 내용들을 모아 <세설신어>라는 야담집을 펴냈다.
<세설신어>는 배송지의 해설(삼국지주, 三國志注)과 더불어 나관중의 <삼국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야기꾼, 즉 설화인들이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중 나관중으로 일컬어지는 집단이 세간에 떠도는 <삼국지>를 모아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다. 이 말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개인적 문학작품이 아니라 삼국지 관련 설화들을 진수의 <삼국지>를 바탕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그런데 사관이 바뀌고 말았다. 유비의 촉한을 정통 중화로 보는 공정(工程)이 진행된 것이다. 날이 가면 갈수록 엄청난 과장과 왜곡이 쌓여만 갔다. 제갈량이 화살 십만 개를 만들고 동남풍을 불게 하였고, 관운장의 혼령 때문에 여몽이 죽고 조조 역시 충격을 받아 죽게 된다.
1400년대 후반에는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가 간행되었고 이외에도 명나라 때는 수십 종의 '삼국지'가 쏟아져 나왔다. 진수의 <삼국지>는 어디까지나 국가에서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중원을 통일한 위나라의 계승자인 진나라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사마(司馬) 씨가 조조가 세운 위(魏)를 멸하고 제위를 찬탈하거나 유비의 촉(蜀)이나 손권의 오(吳)나라에 대해서 역사적 왜곡들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승자의 기록임에는 분명하다. 승자의 기록이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기술이 그렇게 이루어져 왔다. 여기에 앞서 배송지의 <삼국지주>가 나온 배경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제가 어째서 배송지에게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해설)을 달도록 황명을 내렸는가 하는 배경 말이다. 배송지에게 삼국지에 주석을 달라 황명을 내린 송나라 문제의 정치적 의도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비록 그의 아버지(유유)가 중원을 북방민족으로부터 지켜내고 자신은 정변을 극복하고 나라를 편안케 했지만, 문제는 아버지가 황제를 시해했다는 원죄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문제는 황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민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국지〉를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그의 아버지가 창업하고 자신의 통치하는 송나라가 중국대륙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천명하였다. 아무리 북위를 비롯한 북조국가들이 힘이 있어도 그들은 단지 무도한 오랑캐 무리라며 스스로 자위하면서 말이다.
왜곡된 중화주의에 놀아난 조선
남북조시대에서 600~700년이 지난 후 절도사 출신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세우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하는 바람에 국방력이 약화되어 요나라와는 '전연의 맹약'을 맺고 재물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하였다. 또한 금나라에게 '정강의 변'을 당하여 나라가 잠시 단절되기도 하였고, 남송으로 거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결국 몽골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엄청난 절망감에 빠진 한족들에게 남아도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각종 사서와 경전, 그리고 부풀려진 삼국지에서 민족적 우월성을 찾기에 급급했다. 특히 주자(朱子)는 자신의 학문적 바탕을 골수 중화주의에 두고 <삼국지>에 대한 철저한 재평가 작업을 통해 유비가 건국한 촉한을 중국에 있어서 유일한 정통 왕조로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주자학이 성리학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왕조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중국인은 더욱 골수 중화주의자, 조선은 골수 사대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소위 한족 왕조 명나라의 '촉한공정'에 한방 먹은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1328~1398)은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를 전면에 기치를 내걸면서 다시 한 번 삼국지의 역사왜곡을 감행하였다. 왜냐하면 지긋지긋한 이민족의 통치에 주눅이 든 한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 가운데 <삼국지>가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는 중화주의를 확산시키는 도구로서 삼국지를 널리 활용하였다. 관우를 관제(關帝)로 추존하는가 하면, 환관 정화를 남방원정에 보내어 삼국지를 동아시아 전체에 퍼지게 하였다. 여기에 조선 조정은 물론 민중들까지도 <삼국지>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소위 한류열풍(漢流熱風)이 조선사회에 불어 사대사상이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발전하여 중국인의 '관우 신격화 농간'에 빠지고 말았다. 관우 사당이 전국 팔도에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국가차원의 제사까지 바쳤다. 임진·정유의 국난극복이 관우의 영험 덕분이니 국가차원의 사당을 세우라는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서울 한복판에 동묘도 세웠다. 전후복구도 바쁜데 쓸데없이 예산과 국력을 낭비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국난극복에, 그리고 전후복구에 여념이 없는 광해군을 마구 흔들었다. 명나라 황제의 세자 책봉이 없었으니 폐세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현실외교를 하고 있는 광해임금을 끌어내리고 환란을 불렀다(인조반정과 정묘·병자호란). 부모의 나라인 명나라를 돕지 않고 후금(청)과 양다리 외교를 한다는 죄목을 씌워서 말이다.
뿌리 깊은 사대주의는 서민음악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판소리 다섯 바탕에 <적벽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소중화주의적 사설로 말이다. 우리의 잣대로 평가한 새로운 <적벽가>가 나오면 좋겠다. 아무튼 우리나라는 나관중 〈삼국지〉의 최대 피해국인데, 현대 중국은 또다시 역사왜곡을 획책하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이다. 그들의 억지가 통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역사의식의 몫이다. 중국을 탓할 바가 아니다. 정말이지 고구려사와 발해사가 문제가 아니다. 이러다간 전체 민족사가 중국사로 넘어갈 판이다. 이제는 역사를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