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타고 일본으로 간 유학생들

2006.11.01 09:00:00


최남선은 1908년 11월 한국 최초의 잡지인 <소년>을 창간하고, 그 권두시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썼다.

“따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텨……ㄹ썩, 텨……ㄹ썩, , 튜르릉, 콱.”

거대한 산과 집채만 한 바위를 때려 부수는 것은 이제 천둥과 번개가 아니다. 바다의 거친 파도였다. 이 파도는 서구문명을 상징한다. 서구문명의 상징인 파도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는 한국 사람들에게 호통친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아, 우리의 힘을 보았느냐! 그렇다면 어서 잠에서 깨어나라, 야만에서 탈출하라, 우리의 힘을 믿어라!

거센 바다를 헤치고 외국으로 떠나라!

바다가 밀려왔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천둥과 번개보다 더 두려운 문명제국의 해일. 바다를 점령하는 국가, 바로 문명제국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 태평양을 지배하는 미국, 동아시아의 길목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 바다를 지배하지 않고서는 문명제국이 될 수 없었다.

윤치호도, 서재필도, 유길준도,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옥균도 모두 바다를 건너 문명제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바다를 건넜던 이유는 조기유학의 붐에 편승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한국이 싫어 도피성 유학을 떠났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이 왜 하필이면 바다를 건너야 했을까? 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지 않았을까?

청나라는 쇠약해 가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일본이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가열차게 추진하고 있을 때, 청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한국 사람들이 바라본 19세기 후반의 청나라는 더럽고 불결한, 아편에 찌들어 사는 야만국이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을 때, 그리고 많은 한국의 계몽지식인들이 ‘독립’, ‘독립’ 또 ‘독립’을 부르짖었을 때, 그 독립은 다름 아닌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주독립이었다. 일본과 미국이 문명의 표본으로 다가왔을 무렵, 청나라는 절대 닮아서는 안 될 후진국가의 모델로 전락해 있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니 당연히 많은 지식인들은 일본과 미국을 선호했고, 국가에서는 일본과 미국으로 관비유학생들을 파견하게 된다.

사비 유학생이 등장하다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갔고,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개화파의 실패로 일본에서 학업에 열중하고 있던 학생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정부가 학비지급을 중단한 것이다. 따라서 국비유학생들은 한국으로 강제 귀국해야만 했다. 이후 한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1894년 일본의 거센 입김이 작용한 갑오경장이 단행된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개혁이 단행되었고, 그동안 주춤했던 유학생 파견이 다시 추진되었다.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반포 후 해외 유학생 파견 사업은 다시 탄력을 받았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의 자제들 중에서 선발된 113명이 1895년에 일본으로 떠난다. 이들 또한 일본의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배운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고 연이어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이로써 한국은 친러세력의 지배하에 놓인다. 격변하는 정세에 따라 유학생들의 활동 또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는 국비유학생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이었다. 그들의 몸은 국가에 얽매여 있었다. 정부는 일본유학생들에게 학비지급을 중단하고 그들을 한국으로 소환한다.

잠시 중단되었던 정부의 일본유학생 파견은 1897년 후반에 들어 재개되었다. 그렇지만 1903년 한국정부는 또다시 일본유학생 전원에게 귀국훈령을 내렸다. 이유는 경비부족이었다. 정부의 소환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은 국가의 명령에 반발하며 단지(斷指)를 결행한다. 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린다. ‘공부하고 싶다. 우리는 한국의 문명개화를 위해 이 한 몸 받친 사람들이다. 우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돈을 보내달라’. 유학생들이 피를 흘리자 한국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위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유학생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아닌 시민사회가 나선 것이다. 더 이상 정부가 유학생들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학생들의 단지동맹이 있은 후 한국정부의 유학생 파견은 주춤했고, 드디어 사비 유학생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때는 바야흐로 1905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08년 10월 11일 오후 1시, 도쿄 시내에 있는 어떤 건물에 백여 명의 청년들이 운집했다.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학생들을 헤치고 한 사내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의 이름은 윤태진(尹台鎭)이었다. 연단 위로 올라간 윤태진은 가슴 벅찬 표정으로 일장 연설을 한다.

“실로 가슴이 벅찹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한 이후 이렇게 많은 수가 당도하기는 처음입니다.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일은 한국유학생사에 남을 미증유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조국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옵니다. 우리나라는 밖으로는 열강의 보호를 받고, 안으로는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된 상황은 국민의 단결심이 없는데서 연유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서구열강과 일본이 독립국이 된 것은 국민의 단결심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천만 동포가 이천만 개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국가가 독립할 수 있겠습니까. 유학생 여러분!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단결하는 일뿐입니다.”

윤태진의 축하연설이 끝나자 신입 유학생 대표인 윤우식(尹宇植)이 답사를 했다.
“선배 여러분!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조국을 떠나 만리타국에 왔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장래의 희망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 희망은 다름 아니라 고통받는 국가를 위해 이 한 몸 받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유학생들의 의무인 것입니다.”
이후 여기저기서 연설이 빗발쳤다. 환영회 자리는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갔다. 유학생들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일본에 왔다. 그 미래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한 한국보다 몇 십 년의 미래를 이미 앞당겨 살고 있는 일본에서 그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미래로 돌아가다

모든 것이 낯설고 놀랍기만 했다. 도쿄는 유학생들에게 미래의 도시였다. 거미줄처럼 뻗은 전선줄, 눈앞을 휙 하며 달아나는 자동차, 굉음을 울리며 전진하는 기차, 3~4층 높이의 건물.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근대화된 도쿄의 문물은 유학생들 전체를 삼켜버릴 듯이 포효했다.

유학생들은 일본에서 서구의 학문을 습득해 갔다. 근대의 과학과 기술을 배웠고, 언어를 배웠고, 철학을 배웠다. 특히 다윈의 진화론을 현실 사회와 접목한 ‘사회진화론’은 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강한 자만 살아남고 약한 자는 멸망한다. 힘센 놈이 세상을 지배한다. 근대화된 일본에서 그들은 생존경쟁의 치열함을 배워나갔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철저하게 힘을 기르는 것이다. 서구 문명의 힘으로, 이를 먼저 배운 일본을 모범으로 하여.

유학생들은 빡빡한 일본 학교의 교과과정을 이수했다. 일본 학교는 한국의 서당과 달랐다. 학생들은 군인처럼 훈련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10분간 쉬는 시간이다. 10분 후 다시 수업을 하는데 수학과 물리학과 지리 등을 오전 중에 배운다.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가 울리면 30분간 점심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서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한다. 오후 수업 종이 울리면 모두 운동장에 집합한다. 운동장에 모여 병식체조(兵式體操)를 훈련하고 오후 2시가 되면 수업은 끝난다.

일본이라는 미래사회에서 유학생들은 ‘문명인’으로 훈련받았다. 일본과 서양제국들은 한국을 야만국으로 취급했다. 일본으로 떠난 유학생들은 야만국에서 문명국으로 시간대를 이동한 셈이다. 일본에서 한번 굴절된 서구문명이었지만 학생들의 열광은 거의 절대적인 숭배에 가까웠다. 유학생들에게 문명이란 지고지선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배워온 모든 사유체계를 전복시킬 만큼 그 위력은 컸다. 유학생들은 몸은 하나이지만 정신은 두 방향으로 가지를 뻗었다. 한 몸으로 두 삶을 살아가는 것. 미래와 과거를 동시에 살아야 하는 숙명이었다. 유학생들은 전근대 사회라 불리는 한국에서 태어나 근대 사회로 추앙받는 일본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그들은 한국에 대한 일정한 거리감을 느꼈다.

유학생들은 서구의 문명을 다른 누구보다 재빠르게 받아들이고 이를 한국 사회로 전파하였다. 우선 그들은 유학생 단체를 만들었다. 유학생 단체는 유학생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함께 공유하는 역할을 겸했다. 또한 그들은 잡지를 만들어 자신들이 학습한 문명을 전파한다. 최초의 유학생 잡지인 <친목회회보>를 비롯하여 <대한학회회보>, <대한유학생월보>, <태극학보> 등이 연달아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신문과 더불어 잡지라는 새로운 근대적 미디어는 인민들을 계몽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던 최남선은 일본에서 <대한유학생월보>를 편집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고국으로 돌아와 1908년 한국 최초의 잡지인 <소년>을 창간했던 것이다.[PAGE BREAK]박람회, 문명제국의 실상을 파악하다

1903년 오사카 박람회[大阪博覽會]를 시작으로 일본은 박람회장 내에 식민지관을 설치하여 다른 나라의 인종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오사카 박람회 측은 한국인을 비롯한 32명의 이민족을 ‘학술인류관’에 보란 듯이 전시했다. ‘학술인류관’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에도 불구하고 이는 유럽의 ‘식민지관’을 그대로 복제한 것이다.

1907년 3월 도쿄 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우에노 공원에서 1903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한국인 유학생 일부가 도교 박람회를 관람하기 위해 우에노 공원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관람료 10전을 내고 제 5호 조선관 부속 수정관에 입장하였다. 눈부시게 화려한 수정관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품’이 있었다. 복장은 매우 초라했다. 얼굴은 하얗게 화장을 했고, 볼 주위에는 진흙처럼 뒤범벅된 붉은 연지 기름이 금방이라도 흘러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통역관이 서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람자들에게 괴상망측한 감정을 느끼게 만든 전시품은 다름 아닌 한국인 여자였다.

학생들은 조선관에 전시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남자는 부산 출신이었고, 여자는 대구 출신이었다. 이들은 도쿄 박람회에 가면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일본 상인의 꼬임에 빠져 따라왔다. 그들은 박람회에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일본인들이 시키는 대로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은 돈을 미끼로 이들을 전시했다. 일본인들은 돈을 벌 목적으로 한국인을 전시했다고는 하지만, 그 행위 안에 잠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감을 몰랐을 리 없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은 밀림에 사는 동물과 같았다.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 그렇기에 유리창 뒤에 전시해 놓고 관람료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국 여자(인종)를, 특히 초라하고 꿈틀거리는 동물처럼 전시함으로써 한국이 ‘야만국’임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문명제국 일본, 구원자인가 침략자인가?

대다수의 유학생들이 그랬던 건 아니지만,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문명제국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이었다. 특정한 어느 나라를 닮는 것이 아니라 ‘문명’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권력에 편입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문명제국의 문화와 풍속을 모방하려는 관성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일종의 문명제국에 대한 콤플렉스지만, 그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문명제국은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와 같다. 근대 초기 유학생들은 몰랐을지 모른다. 문명제국이 자신들의 구원자가 아니라 결국 침략자라는 사실을. 초기 유학생들에게 문명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고, 자신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무기였다. 그들은 문명국의 힘을 빌어서 한국 또한 문명제국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인천대 강사·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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