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달려온다!
‘속도’가 우리의 일상을 삼켜버렸다. 단 몇 초 만에 부팅되지 않는 컴퓨터는 고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 시속 300㎞로 질주하는 고속철도의 속도도 그리 빠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속도는 속도를 낳을 뿐만 아니라 속도는 인간을 훈육한다. 좀 더 편리하고 윤택한 세상을 꿈꿨던 인간은 새로운 사이보그의 출현을 갈망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대뇌와 신경세포는 마치 CPU와 RAM의 기능으로 탈바꿈하여 인간이 세상을 인지하는지, 기계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인지하게 만드는지 모르는 모호한 경계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기계와 인간은 모두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 왔다. ‘IT 산업’이 각광받고 있는 현시점에서 바라본다면 구닥다리 기계가 판을 치는 시대였을지는 몰라도, 백여 년 전 세계는 새로운 기계의 출현으로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기계란 바로 ‘증기기관’이었다.
5대양 6대주를 횡단했던 유길준은 1889년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은 ‘증기의 세계다!’ 산업혁명의 적자인 증기기관이야말로 신세계를 이끌어가고 구성해가는 최첨단 엔진이었다. 증기기관의 운동이 가열 차게 회전할수록 세상도 그와 함께 재빠르게 변해갔으며, 우리의 삶은 증기기관의 자장(磁場) 속으로 급속하게 빨려 들어갔다. 증기기관의 발명은 단순한 기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최신식 DMB폰으로 인해 전 세계의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내 손안에서 주무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증기기관은 세상을 쉼 없이 움직이고 유통하게 만드는 거대한 기관이었다.
1895년 12월 28일에는 뤼미에르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영화를 상영했다. 그 제목은 <기차의 도착>이었다.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들은 기차가 마치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줄로 착각을 했다고 한다. 물론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보았던 관람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근대식 동력기관의 총아라고 불리는 ‘기차’ 그 자체는 아니었다. 무성영화이었기 때문에 기차의 우렁찬 굉음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스크린 위에 재현된 영상이 현실을 대체할 만큼 사실적이었고, 바로 그 리얼리티를 만들어 낸 영화에 대해서 감탄한 셈이다.
문자문화 탄생이 말하기를 구술·청각의 세계에서 시각의 세계로 전환시킨 인류 문명사의 대변혁이었듯이, 영화의 탄생은 근대적 시각화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시각화되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뤼미에르 형제가 섭외한 근대의 상징이 ‘기차’였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차와 증기선은 근대의 상징이자, 세계 여행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교통수단이었다. 만약 이 두 기관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세계’란 말은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중국과 일본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견문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를 식민지로 개척하면서 비롯되었다.
개항을 계기로 외국을 여행한 사신(使臣)들은 기차의 외양과 내부의 화려함에 정신이 혼미해 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을 무엇보다도 놀라게 만들었던 것은 기차의 ‘속도’였다. 조선 최초의 수신사 김기수의 표현을 빌면 “기차는 불을 뿜고 회오리바람처럼 가 버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보이지 않게 되어 그저 머리만 긁적거리게 만드는 기기음교(奇技淫巧)의 극치”였다. 그러나 ‘눈을 현혹하는 음란한 기술’인 기차의 출현은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사회와 문화를 접속하게 만들어 주었던 획기적인 미디어였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 소령이 마지막에 일갈했던 말과 동일할 것이다. “네트는 광대해!”
여행,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문화적 체험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주체성 형성에 있어 타자의 발견은 필수적이다. 타자의 발견 없는 주체성의 형성은 절대자인 신(神)의 위치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로서의 여행이 깃발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여행의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시대로부터 존재했다.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지속되어 온 여행의 목적은 왕명의 집행을 위한 공적인 목적의 여행, 상인들의 대상행렬(隊商行列), 성지순례, 치료를 위한 여행, 그리고 여행 그 자체를 위한 여행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유럽중심주의적 개념인 ‘지리상의 발견’ 이후의 여행은 단순한 대상행렬이거나 성지순례 등의 여행과는 그 목적이 다르다. 이는 증기기관의 발달로 인해 증기선과 기차가 중요한 여행의 교통수단이 되면서 등장한 근대적 여행, 즉 ‘관광’도 마찬가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의 여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경계 안에서 행해졌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유럽(서양)의 타자인 ‘동양’을 발견해냄으로써 유럽문명을 선(善)하고 우월한 것으로 규정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유럽 국가들은 많은 지식인들을 동양으로 파견하였으며, 그들은 철저한 필드워크를 진행하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동양의 이미지’를 재구성하였다. 이때 구성된 동양은 ‘야만’과 동일한 말이었다. ‘야만의 박물지’로 명명할 수 있는 동양에 대한 기록은 동양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이미지이다.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해 왔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었고 그 밖에 위치한 나라들은 ‘오랑캐’로 치부했다. 조선의 사신들은 자신의 젖가슴을 꺼내어 보여주는 일본 여자들과 몸을 칼로 찔러서 산수와 초목을 그린 문신을 한 일본사람들에 대해서 “사람과 같지 않은 오랑캐에 불과하며, 그들은 한 마디로 매우 더러워할 만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조선 사신들의 이러한 말은 유럽인들이 동양인들에 대한 비하의 발언과 동일한 맥락이었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개항의 거센 물결이 조선에 들이치자 조선인들도 어느덧 야만스러운 ‘오랑캐’가 되어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조선을 똥과 오물이 나뒹구는 더러운 나라이자 도망치고 싶은 흉악한 나라로 불렀다. 조선의 여행자들이 일본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나 영국의 여행자들이 조선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의 근거에는 철저하게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했다. 또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면서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역전되어 오히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야만인’으로 부르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반도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살았던 조선인들은 기차와 증기선의 발달에 따라 서로 다른 나라를 쉽게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이제 ‘바람이 달리고 번개가 치는 듯한 충격’을 온몸으로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식 교통체계의 발달에 따른 세계관의 변화와 자아와 타자의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은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정도와 권력과 힘에 의해서 수직적으로 재편되어 갔다.
미지와의 조우, 신세계를 견문하다
100여 년 전 조선인들의 세계 체험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세계 여행은 대부분 사행(使行)이었다. 조선은 일본을 비롯하여 서양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신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고, 사신들은 공적인 여행을 통해서 조선과는 다른 세계를 체험하였다. 이들이 여행한 공간은 근대식 공원, 박람회, 학교, 무도회장, 연극장, 감옥, 전신국 등이었고, 이는 서양이 자신들의 우월한 문명을 과시하는 공간이었다. 사신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곳’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나라들이 ‘보여주고 싶은 곳’을 어쩔 수 없이 보아야만 했다. 사신들은 서양이 보여 준 공간을 통해서 근대화를 실감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100여 년 전 사신들의 여행은 단순히 여행으로 끝났던 것이 아니라 ‘진정한 지식의 대근원을 살피는 것’이었으며, 그 지식이란 서양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앎이었다. ‘지금 - 여기’의 우리 삶은 바로 100년 전 여행자들이 체험했던 서양 세계를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100년 전 여행자들은 서구 문명국가가 만들어 놓은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시선 속에서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여행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제 100년 전 여행자들의 여정에 따라 그들이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긴장하며, 때로는 요동쳐야만 했던 현장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이 여행의 목적은 지금도 우리의 몸과 의식 속에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는 ‘서구화 = 근대화’의 본질과 싸우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