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귀퉁이의 교사가 될 것인가, 사회 복판의 교사가 될 것인가?

2016.09.01 09:00:00

<조선교육사>라는 명저를 남긴 이만규 선생은 1906년에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려 하였으나, 입시에 실패하여 부득이(?)하게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 개업 의사가 되었으나 곧 폐업하고 사립중학교 생물교사로 교직의 길을 선택하였다. 근대 초기에는 이처럼 교육자가 의사에 버금가는 전문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의사와 교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의사는 전문직, 교사는 일반 급여생활자 혹은 유사 전문직 정도로 인식의 전도가 일어났다. 역사가 만든 비극이지만 교육자들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교직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다. 의사·변호사 등 근대적 직종의 약진 속에서 열악한 근무조건과 부족한 경제적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교사들의 아우성이 쉴 사이 없이 노출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원노동조합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에 결성되어 교원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근무여건 개선에 몰두하고 있던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의 적극적 활동에 고무된 측면도 있었다. 물론 1950년대 중반 이후 일교조의 과격성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함께 들렸다.

1958년 11월에 일부 교사들 중심으로 노동자 단체와 연합하여 교원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적이 있었고, 1959년 4월에 법무부가 교원노동조합 설립 불가를 선언함으로써 교원노동조합 설립 운동이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직의 성격에 관한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교사에 대한 사회적 기대, 교사에게 거는 도덕적 책임의 크기에 비해 교사를 보는 사회 일반의 시선과 경제적 보상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해 교사들의 불만은 누적되었고, 교직의 사회적 선호도는 하락하고 있었다. 교사들은 처우개선과 인식개선을 요구하였고, 반면 사회는 교사들에게 전문성 향상을 요구하였다.

정범모, 교사의 전문성 향상 위한 자기반성과 노력 촉구
4·19혁명 직전인 1960년 <새교육> 신년호에서 서울대학교 교육심리학과 정범모 교수는 ‘우리는 오해받고 있다. 또 오해받을 만도 되어 있다’라는 글을 통해 전국 8만 교사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교육자가 전문직으로서의 대우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범 속의 교사가 아닌 전문의 교사, 좀팽이 교사가 아닌 폭넓은 교사, 그리고 학교 귀퉁이의 교사가 아닌 사회 복판의 교사가 되기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선생질’이라는 모욕적 표현으로 교사를 사회적 나락 속에 몰아넣고 있는 당시 현실에 대한 책임은 교육자들 자신 속에 있다는 말로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또 교직이 전문직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첫째, 전문직은 이론적 배경이 심오하여야 한다. 둘째, 그 이론을 체득하기 위한 긴 훈련 기간이 요구되어야 한다. 셋째, 경험의 축적보다는 이론의 명석이 직책 운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넷째, 전문직에 머물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발달해가는 이론을 추구해야 한다. 다섯째, 전문직으로서의 표준을 유지하고 향상하고 감독하는 데 필요한 전문단체가 있어야 한다. 이런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교육자들의 자기반성과 노력 없이는 전문직으로서의 대우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는 보았다. 정범모는 교사들에게 사회 속으로 나아갈 것을 이렇게 주문하고 있다.

학교의 귀퉁이 속에서 오무락 조무락 잔소리를 일삼는 교사보다, 생동하는 현 사회의 한복판에서 눈 딱 뜨고 그 구석구석을 내다보며 다음과 내일의 사회를 계획하는 교사, 그것이 학생이 요구하는, 사회인이 요구하는 현대의 교사다. 고장의 술집이 어디에 있는지, 고장의 악(惡)과 선(善)과 화(禍)와 복(福)과 손(損)과 득(得)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교사는 좀팽이라는 오해, 낙오자라는 처우를 받기에 꼭 알맞을 뿐 아니라, 그의 교육은 십중팔구 발전과 신장의 교육이기보다는 퇴행과 위축의 교육이 되고 말 것이다. 백년퇴보지대계(百年退步之大計)다.

교원의 처우개선을 위한 법 개정 논의를 하던 국회에서 한 국회의원이 교원노조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새교육> 1960년 2월호는 권두언에서 이 주장을 “무식한 국회의원의 뇌까리는 말”로 규정하였다. 나아가 특집 ‘교원과 보수’를 통해 의심할 바 없이 “교사는 전문직”이라고 규정한 후 처우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반면 1960년 5월호에서 현직 교사 김윤식은 전문직이 되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자각과 노력이 선행조건임을 주장하였다. 교직은 전문직이라는 대한교련의 주장과 교직을 전문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자기반성이 충돌하고 있는 시기였다.

일교조 모방한 교원노조 출현…정부가 대립 심화
4·19혁명의 성공은 교직 사회의 갈등을 폭발시켰다. 혁명 직후인 1960년 4월 29일 대구에서 교련배척운동이 시작되었고, 5월 1일에는 서울에서 교원노조결성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어서 대구·서울·부산 등 지역별 교원노조가 결성되었다. 과도정부 문교부는 교원노조 불인정 방침을 지속하였고, 교원노조 측은 적극적 투쟁으로 맞섰다. 민주당 정권의 온건한 태도는 교원노조 운동의 확장을 가져왔고 1961년 초에는 2~4만 명의 교원이 노조에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대한교련은 교원노조의 시기상조 내지는 불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NEA(National Education Association : 전미교육협회) 간부를 비롯하여 외국의 전문가들도 <새교육>을 통해 노조설립은 시기상조이며 교련을 통한 개혁이 해답이라는 제안을 쏟아냈다. 그들은 교련의 개편과 기능 강화를 통해서 교원의 지위 향상과 처우개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교원노조의 설립을 인정할 경우 일본에서처럼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점, 나아가 파업 등으로 인해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가 근본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교원노조 불가론을 폈다. 물론 교련과 교원노조의 양립 및 협력이 가능하며 필요하다는 주장이 교련 내부에서 제기되고 <새교육>에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소수 의견에 머물렀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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