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쓰지 않는 말 가운데 ‘직할시’란 것이 있다. 도(道)에 속하지 않고 중앙정부가 관여하던 도시로 부산이나 대구, 광주, 인천, 대전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의 광역시와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형식적으로 중앙정부에 속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직할시’로 불렀다. 이런 지역이 예전에도 있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유수부(留守府)’다. 이곳에 파견되는 관리 ‘유수’는 지방 관리가 아니라 경관직, 그러니까 중앙정부 관리다.
어떤 곳이 이와 같은 지위를 누렸을까? 처음에는 내력 깊은 도시가 그 이름을 얻었으니, 전 왕조의 도읍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전통은 조선에도 이어져 조선의 발상지였던 전주와 고려의 도읍지 개성이 유수부로서 지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전대미문의 병란을 겪으며 유수부 역할에 변화가 왔다. 유수부는 수도인 한양을 지키고 지역 거점 도시가 돼야 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조선 후기 네 개의 유수부다. 북쪽의 개성,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남쪽의 수원이다. 이들 도시는 조선시대 정부 직할시였던 것이다. 갈 수 없는 개성을 제외하고 세 도시에는 특별한 기억과 유적이 남아있다.
강화유수부, 서울로 가는 길목
강화도를 상징하는 말이 있다. ‘5진7보53돈대’ 이 말이 무엇인지는 강화도 답사를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진과 보는 큰 규모의 군사시설이며 돈대는 10여 명의 군사가 지키는 작은 군사시설이다. 숫자에서 알 수 있듯 섬 전체가 군사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는 행정구역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이다. 강화군을 상징하는 깃발을 보면 세 갈래의 물줄기가 표시돼 있다. 강화도로 흘러들어오는 세 개의 강을 뜻한다.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다. 예성강은 개성으로, 한강은 서울로 연결된다. 고려든, 조선이든 강화도는 인후, 그러니까 도읍지로 가는 목구멍 역할을 했다. 만약 바닷길로 쳐들어오는 적이라면 여기만 넘으면 개성과 한양에 닿을 수 있다. 육지에서 적이 도읍지로 쳐들어온다면 피란을 하기에 적당하다.
이런 강화도의 역할은 어느 때는 성공했고 어느 때는 실패했다. 고려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과 항쟁을 벌인 것은 그 정당성 여부를 떠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갖게 해줬다. 1627년, 후금의 공격을 받은 조선 정부는 강화도에서 무난하게 화약을 맺었다. 병인년과 신미년의 서양오랑캐도 그럭저럭 막아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성공이었고 누군가는 실패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병자호란 당시 청의 강화도 함락으로 겪은 처참함과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 이후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강화도의 성공은 강화도의 몫이다. 험한 서해의 수로와 공들여 만든 군사시설 덕분이었다. 실패는 정부 몫인 것 같다. 강화도를 믿고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유수부, 또 하나의 도읍지
광주유수부가 설치된 곳은 바로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이다. 산성리라고 불렀던 마을이 바로 광주의 중심이었다. 광주(廣州)는 이름처럼 넓은 곳이다. 경기도란 이름을 쓰기 전에 양광도라고 불렸으니 양주와 더불어 광주는 이 지역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광주유수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아 보인다. 이유는 뭘까.
하나는 1917년, 남한산성에서 지금의 경안리로 옮겨왔기 때문일 것이다. 산 속 깊은 곳에 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인 읍치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다른 전쟁과 달리 병자호란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아서인 것 같다. 인조 때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한산성에 광주유수부가 설치됐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전에 건설됐다. 청과 이어지는 불안한 정세 속에서 한양이 위험에 빠졌을 때 왕은 강화도로,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조가 미적거리는 바람에 결국 남한산성에서 왕과 세자는 청군과 대치해야 했다. 47일 간의 농성전 끝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 정부의 남한산성 건설은 실패였을까. 후대 왕들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은 것 같다. 적이 함락하지 못했다고 봤고 남한산성은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자 남한산성 행궁 안에 종묘와 사직을 옮겨올 건물까지 지은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제에 맞서 의병의 거점이 됐다는 이유로 광주의 중심부는 남한산성을 떠났다. 유수부의 건물도 사라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유수부의 이미지를 잃고 산성 안의 마을 정도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수원유수부, 새로운 도시의 시작
수원은 네 개 유수부 가운데 가장 늦게 설치됐고 또 설치기간도 짧지만 네 곳 가운데 가장 큰 발전을 보인 곳이다. 그 이유는 유수부를 설치했던 정조의 안목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수원유수부는 수원 화성 건설 직전에 설치됐다. 그러므로 화성이 수원유수부다. 방어시설로서 훌륭할 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갖췄으며 무엇보다 화성 건설에 대한 기록이 온전하다는 점에서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가치를 지닌다. 이 성곽에서 가장 특이한 부분은 정문이 북문, 곧 장안문이란 점이다.
조선시대 읍성 정문은 대개 남문이며 북문은 없는 경우도 많다. 전통적인 마을 구성 원리가 배산임수, 곧 북쪽으로 산을 두고 마을의 거리는 남쪽을 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양도 이 규칙을 따라 북문인 숙정문은 쓰지 않는 문이었다. 그런데 화성은 북문을 정문으로 삼고 이에 호응하는 큰 문은 남문인 팔달문이 되도록 했다. 화성의 큰 길은 남북을 관통하는 것이다. 장안문과 팔달문은 2층 지붕으로 돼 있지만 동문과 서문인 창룡문과 화서문은 단층 지붕을 이고 있다. 이제까지 볼 수 없던 마을 구성의 원칙은 정조의 도시 건설 계획과 관련이 있다. 정조는 서울과 삼남(충청, 전라, 경상)을 잇는 교통로로서 수원의 위치에 눈을 돌렸다. 전쟁 뿐 아니라 상업을 염두에 둔 유수부 건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생각은 반대파의 집권으로 꺾이는 듯 했지만 수원의 가치는 그대로 이어졌다. 비록 다른 지역과 달리 전쟁도 없고 짧은 기간 존재했던 수원유수부였지만 지금은 가장 익숙한 곳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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