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세상을 달리 한 천이두(1929~2017, 호적은 1930년생) 문학평론가 빈소에 다녀왔다. 또 한 명의 문인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또’라고 말한 것은 2013년 라대곤 수필가 겸 소설가를 시작으로 김정웅⋅노진선 시인, 2015년 이기반⋅정희수 시인, 2016년 박만기 시인, 정주환 수필가 등 이런저런 인연을 맺어온 문인들이 거의 해마다 세상을 떠나고 있어서다.
특히 천이두 평론가는 내게 대학 은사다. 전북대에 있다 무슨 사정인지 원광대 국어교육과로 옮겨온 1978년 이듬해 나는 인문계열 늦깎이 입학생이었다. 이후 국문과 학생으로 천 교수 강의를 들었다. 1958년 월간 ‘현대문학’에 조연현 추천 평론으로 데뷔한 천 교수는 평론집에서 보듯 달변인 글과 달리 말은 다소 눌변이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졸업후 나는 전남으로 교사 발령을 받았다. 나는 객지에서의 교편생활로 인해 어느 해인가 천이두 교수 장남 결혼식에 참석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냥 대학 은사의 한 분으로 남는 듯했지만, 결정적 계기가 생겼다. 천이두 문학평론가가 회장으로 있는 ‘표현’지 신인문학상에 응모한 평론 황석영론의 당선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1989년 1월 심사평과 함께 당선작이 실린 ‘표현’ 제16호가 나왔다. 3인의 심사위원은 김교선⋅천이두⋅이상비 교수 겸 평론가였다. “논증의 방법이 단순하다는 것이 결함이랄 수가 있지만, 문장이나 비평적 안목이 섬세하고 간명한 점은 높이 살만해 당선작으로 선정키로 합의를 보았다”는 내용의 심사평이었다.
이듬해 염무웅 평론가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무등일보 신춘문예를 한번 더 거치긴 했지만, 사실상 천이두 표현문학회장은 나를 문학평론가의 길로 나아가게 해준 스승이자 멘토였다. 김교선⋅이상비 교수 겸 평론가가 각각 2006년과 2008년 세상을 달리 했으니 이를테면 심사위원 세 분 모두 고인이 된 셈이다.
내가 문학평론가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1989년 천이두 교수는 회갑을 맞았다. 화갑기념논문 봉정식에 참석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사제지간이더라도 참석하고 축하해야 마땅한데, 하물며 나를 문학평론가가 되게 해준 심사위원으로서의 스승이니 일러 무엇 하겠는가. 그후 교수임용지원서류제출에 필요한 추천서를 받기 위해 자택으로 뵈러 간 적도 있다.
천이두 문학평론가가 남긴 평론집 등 저서는 모두 10권이다. <한국현대소설론>(1969) <종합에의 의지>(1974) <한국소설의 관점>(1980) <문학과 시대>(1982) <한국문학과 한>(1985) <판소리명창 임방울>(1986,평전) <삶과 꿈 사이에서>(1989,에세이) <한의 구조 연구>(1993) <한국소설의 흐름>(1998) <우리 시대의 문학>(1998) 등이다. 그 외 <하남천이두선생화갑기념논총>(1989)이 있다.
내가 집필자로 참여한 <전북문단 70년사-평론문단사>(2016)에 따르면 “그의 비평은 예리한 분석으로 정확하게 작가와 작품을 해석 비판할 뿐만 아니라, 세련된 문장으로 평론의 문학성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소설과 시는 물론이고 판소리 계통의 한국적 한(恨)의 정서에 천착함으로써 한국문학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평론가”이다.
한편 천이두 문학평론가는 현대문학상(1965)⋅전북문화상(1975)⋅월탄문학상(1983)⋅모악문학상(1994)⋅동리문학대상(2001) 등을 수상했다. 수상내역을 보면 활동이나 존재감에 비해 평단 나아가 문단이 그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유명 평론문학상이나 목정문화상 수상자로는 이름을 올리지 못해서다. 상복(賞福)은 없었던 것인가?
이제 천이두 스승은 내 앨범 속 사진으로만 살아계실 뿐이지만, 그나마 위안삼는 것이 있다. 70대 초반에 세상을 달리한 여러 문인들과 다르게 88세로 우리 곁을 떠난 점이다. 10년 넘게 견디신 병상생활의 그 고단함을 훌훌 털어버린 점이다. 스승이 남긴 비평은 필자뿐 아니라 많은 평론가, 학자와 연구자들 글에서 부분적으로 오롯이 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