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9일 개봉한 ‘왕의 남자’로 천만클럽 주인공이 된 이준익 감독이 2015년 ‘사도’, 2016년 ‘동주’에 이어 2017년 또 일을 냈다. 6월 28일 ‘박열’을 개봉한 것. 개봉만 했다면 일을 냈다고 말할 수 없을텐데, 자그만치 235만 7499명(8월 11일 기준)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3년 연속 흥행 성공한 영화가 되었으니 또 일을 낸 것이라 말할 수밖에.
‘박열’의 순제작비는 26억 원쯤이다. 마케팅비까지 합친 총 제작비는 40억 원으로 알려졌다. 손익분기점이 150만 명 정도인데, 극장으로만 235만 명 넘게 불러 들였으니 대박은 아니어도 흥행성공작이랄 수 있다. 58세의 ‘원로’ 감독이 1년에 1편씩, 그것도 연거푸 흥행작을 연출해내니 일을 냈다고 한 것이다.
‘박열’의 흥행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의 경쟁에서 얻은 결과라 의미가 더 크다. ‘박열’ 개봉 1주 전엔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 1주 후엔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간판을 내걸었다.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가 261만 명, ‘스파이더맨: 홈커밍’이 무려 725만 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와중에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와의 경쟁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같은 날 개봉한 김수현 주연의 100억 대(115억 원) 대작 ‘리얼’이 고작 47만 107명에 머문 채 확 나가떨어졌으니까. 이래저래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8월 4일 ‘박열’에 참여했던 배우, 스태프들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소재 한 음식점에 모여 흥행기념 파티를 열었다나 어쨌다나.
그렇다면 ‘박열’은 어떤 영화인가? ‘개새끼’란 시 낭송 등 첫 장면부터 강한 인상을 풍기는 ‘박열’은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박열(이제훈)의 이야기다. 영화의 또 다른 축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가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일제 침략기를 다룬 영화들과 궤를 달리 한다.
그들이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지점에서 출발해 그런지도 모른다. “나도 아나키스트라며 동거하자”는 제안이라든가 “폭동, 말만 들어도 설레네”하는 가네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딱히 독립을 외치지 않으면서도,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를 주요 표적으로 삼는 박열과 가해국 일본의 국민 가네코가 그렇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저항이고 독립운동이기에 일반대중의 관심을 끈 것이라 해야 맞다. 유머를 가미한 접근법도 영 새롭게 다가온다. 1차 공판에서의 사모관대(박열)와 치마저고리 한복(가네코)차림 출두는 또 다른 독립운동처럼 느껴진다. “공짜로 피와 소변을 달라고 하냐?”는 가네코의 의사 면담 에피소드 등 유머도 웃음보다 긴장감 완화에 효과적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미쳐 날뛰는 자경단의 잔학성을 드러내고, “천황 같은 기생충”이라면서도 법을 지키려는 사법대신이나 박열을 응원하는 일본 민중들과 변호인 등 양심있는 지식인을 끼어 넣음으로써 살린 균제미도 눈길을 끈다. 침략 후 일본이나 일본인은 무조건 나빠야 하는 고정관념 내지 등식을 벗어나 있어서다.
한 가지 그냥 지나쳐버리면 큰 일 날 것 같은 게 있다. 배우들 연기다. 풍자적이면서 통쾌한, 그래서 침략국 일본을 갖고 놀거나 최소한 조롱하는 박열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한 이제훈도 그렇지만, 가네코를 연기한 최희서가 더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한국어 발음과 표정 등 어쩌면 그렇게 한국 배우가 일본인으로 감쪽같이 변신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아쉬운 건 그런 가네코가 왜 죽었는지 그 처리가 모호한 점이다. 8월 11일 밤 KBS가 방송한 ‘8⋅15기획팩션드라마-가네코 후미코’를 보면 목맨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영화에선 자살인지 타살인지 애매하게 그려졌다. 박열의 과거 행적이나 가족 얘기가 회상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도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