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내 마음을 다독거려줄 것이라는 믿음

2017.12.01 09:00:00

대화가 통하지 않는 십 대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까? 벌써 가슴이 답답해져온다. 세상살이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서로가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펼치고도 ‘상대가 끝까지 자신의 의견만을 고수할 때 느끼는 답답함’인데, 이 경우에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일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저마다 엇비슷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난 후에 느끼는 답답함이니까 말이다. 이 상황의 주인공을 학생과 교사로 설정하여 유추해보면 어떻게 될까? 서로가 엇 비슷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는 있을까?


수업은 학생과의 대화가 아니다

사실 ‘교사인 나’는 거의 학생과 대화하지 않는다. 아침 조회 시간에 교실에 들어가서 지각이나 결석을 챙기고, 바뀐 시간표를 알려주고, 학교생활의 소소한 상황들 을 얘기하는 것, 종례 시간에 교실에서 가정통신문을 배부하고 다음 날 챙겨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청소와 하교를 지도한다. 이런 일을 하는 교사가 틈틈이 학생과 나누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교과시간에 수업을 하는 것? 이것도 대화는 아니다. 그렇다면 교사는 언제 학생과 대화를 하는 걸까? 매년 신학기 초에 상담주간을 실시한다. 하지만 소수의 학교를 제외하면 이것도 허울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정규수업을 마치고 나면 학생들은 저마다 학원으로 바삐 가야 하고, 교사들은 수업에 우선순위가 밀린 갖가지 업무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상담’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수업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여 상담할 시간을 마련하는 몇몇 학교가 있어서 단 10분이라도 전체 학급 학생들과 개별상담을 실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교사인 나’는 그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가정환경 언저리와 공부 현황, 꿈, 진로 등에 관해 묻고 답을 듣는 정도인데 이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 담임과 학생으로 만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난 시점에서 서로 마주하고 나누는 질문과 답변일 뿐이다. 조·종례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엎드려있는 아이를 보면 나는 늘 “어디 아프니?”라고 묻지만 이것이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과 하루하루를 함께 하고 있지만 스스로 ‘교사인 나’를 찾아오는 아이를 제외하고 나면 내가 대화를 나누는 아이는 결단코 많지 않다.


대화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어른인 ‘나’는 누구와 대화를 할까? 친구나 맘이 맞는 동료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때로는 영화를 함께 보며 나누는 이야기들, 그 소소한 일과 속에서 서로가 느낀 마음 단편들을 펼쳐놓으며 함께 감정을 공유하고 생각을 나누는 이런 것들이 대화가 아닐까? 마음을 나누는 직장상사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어떠 한 직장상사와는 대화가 잘 안 되는 걸까?


이사를 해야 해서 하루 연가를 쓰겠다는 교사에게 방학 때 이사하지 왜 학기 중에 이사를 하냐며 교장의 구두결재 먼저 받아오라는 교감과 나는 대화하지 않는다. 같은 질병이라 해도 석 달 전에 제출한 대학병원의 진단서로는 안 되니 진단서를 다시 제출해야 수능 감독을 면할 수 있다는 직장상사와도 나는 ‘대화’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다.


만약 그가 “지병이고 장시간 서 있는 것이 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행정상 최근 일자의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이사라는 게 선생님이 편한 시점에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학기 중에 연가를 신청하는 선생님 마음도 불편하겠네요”라고 말문을 여는 직장상사라면 나는 그와 대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대화라는 것은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내가 마음을 꺼내놓으면 상대가 그 마음을 도닥여줄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대화를 통해서 ‘마음’을 주고받을 때 우리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고 든든해지는데 교사는 ‘대화’보다는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더 능숙한 것 같다. 교사는 학생이 무지의 상태라는 것을 전제하고 이해시키는 데 주력한다. 이러한 태도는 대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교사는 아이의 문제점에 대해서 아이의 말을 듣기보다는 교사가 가진 정답을 얘기한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학생에게 왜 그랬는지를 묻기보다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우선 논한다.


교사만 그 아이와 대화했을 뿐 아이는 대화하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기 싫다며 무단으로 결석한 아이가 10일 만에 학교에 나타났을 때 ‘교사인 나’는 그 아이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왜 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 다니는 게 안전하다는 것, 앞으로 있을 학교의 다양한 행사들, 반 친구들이 너의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것,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은 잃게 되는 게 세상 인데 검정고시를 치면 세상 사람들이 왜곡된 시선으로 너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 하루를 너 스스로 계획하며 공부하는 것이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는 것, 네가 학교에 가지 않음으로 인해 너의 부모님이 느끼는 힘겨움, 공부야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친구들과 지내면서 대인관계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데 학교를 오지 않으면 대인관계 능력을 기를 수 없다는 것 등등을 이야기했다.


30여 분 동안 이어진 대화 동안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겠어?”에 대한 “예”가 전부였다. 나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어느 교사도 그 아이에게 학교에 오지 않는 시간 동안 어떤 것이 행복했는지 묻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 지내는 동안 무엇이 아쉽고 힘들었는지, 외롭지는 않았는지, 그 아쉬움과 어려움은 어 떻게 달래고 지내왔는지, 긴 하루 동안 무엇을 하며 지내왔는지, 지금 아이의 생각은 어떤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사만 그 아이와 대화했을 뿐 아이는 교사와 대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그 아이와 ‘대화’했고 ‘상담’했다 고 굳게 믿고 있다. 왜냐하면 ‘교사인 나’는 그 아이가 학교에 와서 반가웠고, 안심했고, 진심으로 그 아이가 학교로 다시 돌아오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교사인 나’와의 대화 동안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자신이 느꼈던 마음 단 한 조각도 드러내고 표현할 수 없었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이러니 내가 선생님하고는 대화를 안 하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상처로 남은 대화

내 기억 속에 상처로 남은 상황은 또 있다. 아침 등교 시간에 화장한 여학생을 불러 세웠다. “너 화장했지?” “안 했는데요.” “안 하긴 뭘 안 해? 비비크림이랑 다 발랐는데! 화장한 것도 모자라서 거짓말까지 하니.”


이 대화는 교사의 지시에 불응해 벌점 5점을 받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분노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늦잠을 자다 화들짝 놀라 깨어 세수도 못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월요일 아침의 학교 교문이었다. 전날 밤에 숙제를 펼쳐놓고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식사는 커녕 세수도 못하고 황급히 달려온 탓에 전날에 했던 화장기가 얼굴에 남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입술에 틴트를 바른 여학생을 불러 세워 왜 틴트를 발랐냐고 물었다. 여학생은 끝까지 안 발랐다고 우겼다. “왜 발라놓고 안 발랐다고 해?” “진짜 안 발랐는데요.” “계속 우기네. 이게 안 바른 입술이야?” “진짜 오늘 안 발랐어요. 휴지로 닦아보세요.” “(틴트가 묻어나오지 않자)지금껏 한 번도 안 발랐어?” “지난 토요일에 친구 따라 ○○가서 테스터 발랐어요.” “발랐잖아. 다음부턴 벌점 준다!”


틴트를 발랐다는 오해를 받은 학생과 교사가 나눈 대화의 시작은 입술을 뜯는 버릇으로 인해서 입술에 핏기가 점점이 드러난 것을 교사가 오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일방적으로 학생의 주장을 부정했고, 자신의 판 단이 틀렸음이 드러난 상황에 직면해서도 물귀신처럼 벌점만 운운할 뿐 오해한 상황에 대한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아이가 강력하게 부정할 때, 그 아이의 얼굴을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거나 자신이 그렇게 믿는 이유에 대한 상황설명이라도 주고받았다면 어땠을까?


나도 아프지 않게 대화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의 동물이다. 하지만 십 대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감정만의 동물이다. 어른도 욱하는 감정을 삭이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십 대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른도 감정을 누르고 이성을 찾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십 대는 그렇게 하려면 엄청난 시간의 흐름이 필요하다. ‘교사인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데 홀로 무수히 많은 질풍노도의 십 대들 속에 존재한다. 그 십 대들은 마치 쓰나미처럼 엄청난 파도로 소리치며 달려오는데, 난 작은 보드 위에 올라 위험스레 파도를 넘으려는 서퍼와 같다. ‘교사인 나’는 넘어져 파도 속으로 잠겨도 다시 뚫고 일어서서 다시 파도를 넘고 싶다. 십 대들의 격한 감정을 타고 유유히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 지치지 않고, 쓰러져버리지 않고, 마음 다치지 않고서 그들 속에서 그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 이 마음은 나 혼자만의 갈망일까? 그들도 마음 다치지 않고서, 지치지 않고서, 쓰러져버리기 전에 ‘교사인 나’와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을까?

조은 서울 신화중학교 교사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