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어려운 것이 많은 요즘, 희망을 섞어 이야기할 소식이 있다. 남과 북이 철도 연결 문제를 놓고 상의한다는 것이다. 남쪽에서 올라간 기차가 북쪽의 철길을 달린다는 것은 흥미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철도 연결 이슈는 이미 오래전에도 나온 적이 있다. 2002년 2월,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은 경의선 도라산역을 방문해 연설을 하고 침목에 공동 서명을 했다. 그 배경에는 군사분계선이 생기면서 끊긴 경의선 기찻길을 두 대통령이 방문하기 직전에 복원했던 일이 있다. 기차는 시범 운행으로 임진각을 지나 도라산역을 거쳐 북쪽의 판문점역까지 다녀왔다. 만약 남북관계가 이후로도 계속 좋은 상태를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다행히 다시 남북이 철도를 연결한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기차가 지나간 도라산역의 이름이 갖는 내력이 흥미롭다. 역 근처에 있는 도라산(都羅山)은 신라(羅) 도읍지(都)를 돌아보는 산이란 의미가 있다. 그런데 누가 여기까지 와서 신라의 도읍지, 서라벌을 돌아보았을까. 그 이야기를 찾아 왕릉으로 떠나보자.
‘도라산’의 배경이 된 연천 경순왕릉
도라산의 주인공은 바로 경순왕이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이름은 김부로 원래 왕이 될 위치가 아니었지만 927년 견훤의 기습으로 경애왕이 죽은 뒤 견훤의 지목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미 기울기 시작한 나라에서 그것도 적이었던 견훤의 선택으로 오른 왕이란 점에서 그의 치세가 어떻게 결말이 날 지는 짐작할 수 있다. 901년 수립된 후삼국시대의 경쟁 속에서 신라는 이미 다른 두 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를 세운 왕건은 신라에 호의적이었다. 931년 서라벌을 찾았으니 견훤과 다르게 군대는 ‘법도가 엄정’하고 왕건은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935년 견훤이 후백제를 탈출해 왕건에게 항복하는 장면을 본 경순왕은 더 이상 백성과 신하를 전쟁의 도탄에 빠트릴 수 없다고 보고 나라를 들어 고려에 바쳤다. 항복이며 멸망이었다. 이런 경순왕의 정치적 판단은 역사가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나뉜다. 이는 당시에도 그랬으니 국서를 왕건에게 들고 갔던 시랑 김봉휴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어간 마의태자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역대 조상들과 달리 경순왕은 경주에 머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는 평화적으로 신라를 합병했다고 하나 경순왕을 경주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항복의 행렬은 거창했다. 경주를 떠나 개성으로 향한 행렬은 30여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마 이런 행차 속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에 잠시 산에 올라 경주를 돌아본 것이 아닐까. 그래서 도라산이란 이름이 생기고 지금의 도라산역이 생긴 배경이 됐을 것이다.
개경에 도착한 경순왕은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혼인 했으며 정승공에 봉해졌고 유화궁이란 궁궐에서 머물렀다. 또 항복하고 나서도 43년을 더 살았다. 멸망한 나라의 군주치고는 덜 비극적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여느 망한 나라의 마지막 왕이 그렇듯이 그의 시호는 신라가 아닌 고려가 준 것이다. ‘예의바르고 순하다’는 뜻의 경순(敬順)은 신라와 그의 비극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고려의 마지막 왕(공양왕)이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순종)역시 그 이름이 갖는 뜻이 비슷하다.
경순왕릉은 경주가 아닌 개성 인근, 그러나 고려 왕릉과는 다른 곳인 연천에 마련됐다. 경순왕이 죽자 임금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줬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옛 신라의 유신을 염두에 둬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왕릉을 만들고 난 뒤 무덤과 함께 그에 대한 기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은 영조 때로 이때 다시 경순왕릉을 발견했다. 거의 800여 년이 지나서의 일이다. 경순왕릉이란 사실을 확인 한 뒤 다시 단장을 한 모양이니 지금 남아있는 능비나 석물은 모두 조선시대 솜씨다. 그런데 이 무덤도 다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남과 북이 분단되면서 민통선이 그어졌는데 그 안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러다가 1975년에 비로소 그 영역을 정비했고 다시 한참이 지난 2005년에 이르러서야 민통선에서 해제되면서 일반인도 답사가 가능해졌다.
경순왕릉을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도와 이정표를 따라가면 경순왕릉에 닿는다. 경순왕릉에 들어서는 순간 많은 생각이 든다. 경주가 아닌 곳에서 신라 왕릉을 만나는 생소함이나 신라 왕릉에 조선시대 석물이 서 있는 점도 그렇지만 무시무시한 왕릉 주변의 ‘지뢰’ 경고판은 시간의 단절을 넘어 공간의 단절마저 느끼게 한다. 한 시대의 끝, 멸망은 이렇게 잊게 되고야 마는 것인가. 그러나 조금 다른 사례가 있다. 발길을 옮겨보자.
3‧1운동의 계기가 된 남양주 홍유릉
남양주 금곡에 가면 홍유릉(洪裕陵)이 있다. 조선시대 왕릉 답사를 왕의 순서에 따라 하다보면 마지막에 만나는 곳인데,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과 두 황후(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유릉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이곳은 한 왕조의 끝을 얘기하지만 경순왕릉과 달리 조금 관심을 기울인다면 새로움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새로움이라니, 한 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묻힌 곳에 그런 것이 있을까.
먼저 홍유릉을 살펴보자. 홍유릉은 다른 조선 왕릉과 달리 ‘황제’의 격에 맞춰 꾸몄다. 그러니 규모와는 별도로 그 구성이 매우 독특해서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하는 침전(寢殿) 앞에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서 있는 생소한 모습을 보게 된다. 황제릉이라는 점에서 일견 반갑게 느껴지지만 여기에 묻힌 주인공에 대한 평가는 차갑기만 하다. 고종과 순종은 나라의 멸망을 맞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멸망의 모습이 우리 역사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외적(外敵) 그러니까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는 점이 크다. 반만 년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초유의 일이다. 그러니 홍유릉에 가면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 어렵다. 조선은 왜 멸망했으며 그걸 극복하지 못한 비판이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를 잡는다. 그런 점에서 경순왕릉처럼 시간의 단절을 상징하는 곳에 그칠 것, 아니 그 이상의 비관적인 얘기가 나올만하다.
그럼에도 홍유릉은 경순왕릉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경순왕의 죽음은 신라의 역사, 더 나아가 고려의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홍유릉의 두 주인공, 그 중에서도 고종의 죽음은 역사에 특별한 계기가 됐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은 조금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그 해 3월 3일 국장을 치르기로 정해졌다. 이미 국권을 상실한 지 10여 년이 지난 때 맞은 고종의 죽음은 조선, 대한제국의 더욱 완전한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단절을 새로운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3월 3일을 계기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갈 대규모 시위를 계획한 것이다. 이후 약간의 조정을 거쳐 시위를 벌이는 날은 3월 1일로 결정됐으니 바로 3‧1운동이다.
3‧1운동이 바로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쌓여 일제에 맞설 힘이 됐고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이 됐다. 그리고 그 해 4월 11일, 상해의 임시정부는 수립을 선포함에 앞서 새롭게 나라 이름을 정했다. ‘대한민국’이다. 황제의 나라였던 ‘대한제국’이 아닌 국민, 시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로 바꿀 것을 선포한 것이다. 고종의 죽음을 상실과 단절의 의미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전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역사 속 시간의 단절은 사람들의 주도적인 노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도라산역 이야기로 가보자. 철로를 연결하는 사업이 다시 시작됐다. 한참 전에 끝났다고 결론을 내렸다면 지금의 시도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식민지지배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어떤 방법이 없다고 포기했다면 우리의 광복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시대구분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 구분은 앞과 뒤가 다른 것이 아니라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 가운데 하나다. 끝과 시작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시간의 단절을 넘어 더 나은 미래를 계획했던 100년 전 역사를 떠올리며 2019년을 생각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