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원. 예부터 군사적 천연의 요새지대로 알려진 교룡산이 있고,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 서남부의 섬진강으로 유입되는 곳.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여의 전쟁을 통틀어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 조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은 이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낮게 뜬 낮달이 성루에 걸려 묻고 또 묻고 있는 곳, 그곳을 찾아 나선다.
가장 참혹했던 대혈전의 현장
남원시 동충동에 위치한 남원성.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지에 있는 읍성이다. 북서쪽 교룡산의 험준한 지세를 갖춘 높고 탄탄한 성벽의 교룡산성과는 비교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422년 전 이곳에서는 들도 산도 마을도 죄다 불태워지고 사람을 잘라 죽이는 학살극이 자행됐다. 조선군 1000명과 남원 백성 6000명, 명나라 군사 3000명이 왜군 6만 명과 치러낸 대혈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른바 남원성 전투였다.
16세기 말 조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역사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가 연합해 물리친 국제 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세계대전’ 또는 ‘동아시아 7년 전쟁’이라고도 불리게 되는 전쟁.
정유년에 ‘거듭’ 왜란이 일어났다 해서 이름 붙여진 정유재란은 이 7년 전쟁 중 가장 참혹했던 전란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왜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 방화는 임진왜란 약 6년간의 피해보다 정유재란 1년여의 짧은 기간의 피해가 훨씬 컸기 때문이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칼로 베고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사슬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부모는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일본 승려 경념(慶念)이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쓴 내용처럼 왜적들의 잔인성은 극에 달했다. 당시 산성이 아닌 읍성을 결전지로 택했던 명나라 파병군의 부총병이었던 양원의 실책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남원성 전투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안타까움이 가을볕에 살이 그을리는 줄도 모른 채 ㄱ자로 남아 있는 성로를 따라 오래 서성였다.
왜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
“전라도는 남김없이 모두 쳐라.” 재침명령서 하나로 전라도 침탈을 강력하게 지시했던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전라도가 차지하는 위상은 실로 남달랐다. 한・중・일 3국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에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지키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한강을 건너 양쯔강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남원은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도로 접어드는 관문이었다. 일찍이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5소경의 하나가 남원이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한 이순신의 말처럼 아군이나 적군 모두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거점지인 셈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이 임진왜란 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수군의 버팀목이자 곡창지대인 호남의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이 때문에 왜적은 기어이 빼앗으려 하고, 우리는 꼭 지키려 했던 곳이 또한 남원이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당시 지시사항이 남아 있다.
2만여 조선 수군이 궤멸한 칠천량 해전의 패전은 정유재란의 판도를 크게 바꿔놓기에 이른다. 호남의 수많은 백성을 처참한 살육의 아비규환으로 내모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식으로 조선 재침공을 명령한 지 5개월여 만이다.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임진왜란 때와는 그 형태가 확연히 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은 대의적 명분을 갖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을 노리며 정명가도(征明假道), 가도입명(假道入明) 즉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군사들의 약탈이나 납치, 방화 등의 행위는 ‘고려국금제(高麗國禁制)’로 저지했다.
정유재란에 이르러서는 명나라가 아닌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했기에, 대놓고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간에 가리지 않고 처단됐다. 하여 조선인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혀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인 몰살 기본 전략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살육을 저지르면서 이들이 향한 곳이 바로 남원성이었다.
악랄함의 극치 ‘조선인 코 수집’
생과 사가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데 어느 곳에 생(生)이라 붙이고 어느 곳에 사(死)라고 붙일 것인가. 잔악하고 참혹했던 피의 전쟁 정유재란은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을 끝으로 발발 22개월여 만에 종결된다. 갑작스러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였다.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조선이 7년간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들에 곡식이 익어도 거두는 이가 없을 만큼 산 사람이 적었다. 그리고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의 함락은 왜군들의 ‘조선인 코 수집’으로 이어진다.
왜군들은 여성과 아이들의 코도 가리지 않고 베어갔다. 왜군의 코 베기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까지 확대됐다. 왜군은 그 수를 세는 것으로 몇 명의 조선군을 베었는지 보고했던 것이다. 사람을 보면 죽이건 안 죽이건 번번이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년간 우리나라 길에는 목숨은 건졌어도 코 없이 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나에게 달려드는 적을 두 명 죽였다. 오늘은 8월 15일. 고향 신사의 제삿날로 생각되었다. 피 묻은 칼을 내던지고 붉게 물든 손을 합장했다. 멀리 일본을 향해 절했다. 코를 잘라 갑옷 주머니에 넣었다.”(오코치 히데모토, ‘조선물어’)
코 영수증(請取狀)과 관련 기록을 보면 조선 사람 코 18만 5738개, 명군 코 2만 9014개 등 모두 21만 4752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 왜군이 얼마나 많은 코를 베어갔는지 정확한 집계는 없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하여 역사는 잊히고, 일제에 의해 1931년 4월 전주 남원 간 전라선이 착공됐다. 애초 일본이 남원역을 이곳에 개설한 것을 두고 ‘일본의 과거 흔적 지우기’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며, 동행한 향토사학자인 한병옥 선생은 울분을 토했다. 현재의 KTX 남원역이 아닌 구 남원역은 성민들까지 합쳐 1만 명이 죽었다고 전해지는 남원성 전투의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원성 전투는 패전이었다. 왜군 또한 이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싸움에서 이겼다고는 해도 엄청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 결과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 작전에 패퇴하는 행보를 걷게 된 치욕을 씻어내고자 남원 역사를 탄생시켰다는 것이 한병옥 선생의 주장이었다.
역이 만들어지기 전 이곳은 원래 순국한 만여 명을 한 곳에 묻어 만든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는 무덤이 있었다. 역이 만들어지면서 만인의총은 교룡산 자락으로 이전됐고, 현재는 만인의총유지(萬人義塚遺地)비만 남아 있는 상태다. 쓸쓸하고 허허로운 초가을 햇살이 따갑게 쏟아들어 저 작은 비가 더욱 애석하게 여겨지던 것도 그 때문이려나.
지금은 철길을 달리던 기차는 보이지 않고, 녹슨 철로 위로 코스모스를 피워내는 ‘향기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공원이 돼 있는 폐역. 한병옥 선생 말대로라면 ‘일제의 주도면밀한 음모’에 의해 우리 선조들의 ‘순국의 자리와 순국의 무덤을 차단하고 늑살 당한 현장’이다. 폐역에도 길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길은 어디로든 나 있다. 역사든, 길이든 떠나지 않는 길은 한낱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사람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짐승들, 벌레들, 산천초목 어느 것 하나 아픔 없이 사는 것은 없다.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남원성은 과거 속에 묻힌 역사가 아닌, 현재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역사다.
사수정도(死守正道)의 만인정신은 무엇이고,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남원성에 가볼 일이다. 그 간절한 물음이 코 없는 넋이 되어서도 목숨의 불, 존재의 불, 정신의 불, 그리고 삶의 불로 활활 타오르는 곳, 그곳이 남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