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졸업식이 끝난 아이들은 분주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썰물처럼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교실을 들락거리며 수업을 열심히 하고 면접 준비를 시켜도, 졸업할 때 찾아와 인사하는 것은 고작 3학년 담임교사에 국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 2학년 때 담임까지 찾아와 인사하는 아이는 별로 없다. 교과 수업만 하던 교사까지 찾아오면 ‘희귀종’이다. 하긴 고3 담임 반 아이들조차도 교실에서 손 흔들곤 끝. 교무실까지 찾아와 인사하는 아이는 전교생 중에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고3 담임 선생님(만) 땡큐!
그렇게 한 해 동안 정들였던 아이들과 이별했다. 새 학년의 배정된 반을 다 불러 주고 빈 교실을 뒷정리하며 혼자 콧날이 시큰했다. 그런데 뒷정리가 끝나도록 기다리며 교실 앞 복도에 혼자 기웃거리던 아이가 있었다.
“선생님, 이거... 학기 중에 드리면 선생님께서 절대 안 받으실 것 같아서요.” 낯익은 글자로 쓴 손편지 한 통과 레몬청 한 병. 쑥스러운 듯 건네며 감사했다고 전한다. 이게 뭐냐고 묻자, “선생님, 커피 많이 드시던데 비타민도 보충하셔요.” 하면서 건네고는 서둘러 나갔다.
손에 들려준 편지를 읽다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가정폭력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아이. 정부가 주는 수당에 기대 엄마, 누나와 지내야 하는 궁핍한 생활 탓에 읽고 싶은 책을 사는 것도, 변변한 학원 등록도 하기 어려웠던 아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기업에서 제공하는 장학금도 받게 하고, 수시로 면담을 하며 무사히 고2의 격변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왔다.
몰라줘도 그만이고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늘 그렇듯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이니까. 그런데 어지간히 마음에 남았던지 꾹꾹 눌러 쓴 손편지에 감사하다는 말과 자신의 꿈이 바뀌어 교사가 되겠다는 이야기. 가슴을 울리고 만다.
물론 한 해 동안 표현하지 않으면 감사가 아니라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주변의 수많은 사랑과 도움과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랬더니 그 수혜자(?)가 되고 말았나 보다. 감사는 아무리 넘쳐도 해가 되지 않으니 늘 그리 가르쳐온 것이다.
절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졸업생이 찾아오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선생님께서는 절 잘 모르실지도 모르지만’이다.
안다. 왜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는지. 하지만 대부분은 기억한다. 얼굴과 이름이 좀 헷갈릴 때가 있어도 대부분 이야기를 이어가면 고구마 줄기처럼 기억이 딸려 올라온다. 그런데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신.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해봐야 날 모를 텐데, 인사는 해서 뭐하나.’
기억은 참 소중한 것이어서 한번 기록이 되면 참 오래 가는 것인데. 그 기억이 추억으로 저장되면 쉽게 희석이 되지도 않는 법인데. 자신을 기억할 것이라는 믿음과 지금의 자신이 있게 한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기억이 인간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깊고 넓게 하는 힘이 있음을 아이들은 알고 있을지.
이별 그리고 만남, 떠나보내고 이제 또 새로 맞이하는 변곡점에 서서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지점이 바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감사하다면 표현하라고 올해도 또 그렇게 가르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