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을에서 책읽기- 학여울 풍경

2020.08.27 08:56:52

카메라가 포착하는 삶의 편린(片鱗)과 시대의 풍경

이용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학여울 풍경》. 푸른 잉크가 번지는 만년필로 서명을 하는 모습에는 삶의 연륜이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시집을 받아들고 첫 만남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래전, 소년 같은 시인은 막걸릿집에 혼자 앉아 카메라를 만지며 긴 침묵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날 경주는 추웠고, 작가 모임이 끝나고 겨울 서라벌의 밤이 아쉬운 저와 벗은 숙소 가까운 보문호로 처용가를 부르며 산책을 하였습니다. 찬바람에도 천년 고도의 향기를 품어 행복하기만 하여, 막걸리나 한잔하자며 들어선 곳에는 모임에서 인사를 나눈 시인이 앉아 파전을 펼치고 막걸리를 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람 같은 문우 한 명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시인의 시가 더 여물어가고 열매를 맺고 다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의 카메라가 포착하는 삶의 편린(片鱗)과 시대의 풍경이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들이 SNS를 타고 흘러들곤 하였습니다. 가족을 지키는 외로운 늑대이며, 문안 인사를 드리러 새벽이슬에 옷자락을 적시는 아들이며, 아직도 청년 장교의 마음으로 검을 사랑하는 바람 같은 영혼입니다.

 

강에 비추어진 설산의 얼굴이 제게 온 시집의 첫모습이었습니다. 산비탈에 내린 눈을 겨울 칼바람이 길을 내어 주름을 만들었고, 그 주름은 어딘가를 향해 포효하는 젊은 호랑이로 그림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표지의 의미를 생각하며 시집을 펼쳤습니다.

 

창 너머로 강이 훌쩍거리며

해를 품고 남쪽으로 길을 나설 때

 

운동장은 눈雪을 덮고 모로 누웠어.

새끼 고라니가 어미 뒤를 종종

 

교실은 아이들이 두고 간

물통 속 아야기를 비우지 못했지 <중략>

 

교실에서 보이지 않는 강은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있었지. /  강이 보이는 교실, 부분

 

시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린 제자들의 눈빛이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와도 그는 출석부의 적힌 이름을 부르는 교사의 마음 자락이 비워지지 않았고, 교실에 두고 간 물통 속 이야기가 강으로 치환되어 그의 꿈속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가에서 청년 교사를 연모하였던 소녀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립니다. 저도 함께 미소짓고 있습니다. 

 

핏줄 인연을 만났습니다.

 

영원한 것이 없음을 알지만

시대의 전쟁터에서 칼과 창으로 싸웠다가

바람에 흩어져 흙으로 돌아갑니다.

 

봄날 학여울로 오소서. /  학여울로 오소서, 전문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나뭇잎 한 장, 그 아래 짧은 시 한 편이 마음을 대신합니다.

푸른 잎은 광합성을 하면서 오직 나무의 성장과 열매를 키우기 위해 살았을 것입니다. 시대의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산화하여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 새봄의 시작일 것입니다.

 

 

시인詩人이란

금강송 숲에서 고독을 견디다

스스로 몸을 태워 거둔

 

언어의 사리舍利로

사막을 건너가는 보병步兵이다/  시인은 보병이다, 전문

 

시는 언어의 가장 순수한 고갱이입니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시를 통해 이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시인이 존경스럽습니다. 언어를 태우고 또 태워 그 속에 남은 에센스가 시가 아닐까요. 뜨거운 사막에서 낙타와 동방의 향료와 비단을 나르는 카라반도 멋있지만, 두 발로 홀로 사막을 나서는 그는 더 아름답습니다. 언어의 육신을 태워 얻은 사리로 사막은 건너가는 보병을 우리는 시인이라 부릅니다.  

 

트럭에 실려 가는 소의 젖은 눈과 마주치는 순간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던 시인의 시가 다시금 아버님을 그리는 절절한 사부곡이 되어 저를 울립니다. 구순의 아버님과 노래방에 가서 나그네 설움을 부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만난 이용철 시인의 시집 《학여울 풍경》을 읽으며, 저도 새로운 계절을 준비합니다. 바람결에 가을 냄새가 날 것 같습니다.

 

『학여울 풍경』, 이용철 지음, 청옥, 2020

 

이선애 수필가, 경남 지정중 교사 sosod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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