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침략전쟁, 정당 출병으로 덧칠하다”

2004.11.10 10:43:00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인가 日 조선침략 아닌 ‘명 정복’위한 출병 주장 中 ‘자위수단’측면 생략, ‘조선후원’만 강조
임진왜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일본은 이 전쟁이 명을 침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日明戰爭’으로 보고자 하는 흐름을 바탕에 깔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명은 지원군을 파견한 제삼자일 뿐 임진왜란은 어디까지나 조일전쟁(朝日戰爭)으로 파악한다. 또 이 전쟁이 역사 교과서에서 기술되는 비중을 살펴보면, 일본에서는 일본의 역사 발전에 주요계기가 된 사건으로서 역사의 본류로 이해되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외부적 충격이었을 뿐 한국사 발전의 중심적 문제로 파악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한편 중국에서는 명군이 참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격파한 조선후원전쟁(朝鮮後援戰爭)으로 보고 북한에서는 일본 침략자들의 침입을 물리친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의 투쟁(임진조국전쟁)으로 보고 있다.

용어 문제
이 전쟁의 명칭에 관해 살펴보면,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는 ‘분로쿠·게이죠 역(文祿·慶長의 役)’ 혹은 ‘조선출병(朝鮮出兵)’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호칭은 이전의 ‘조선정벌’에 비해서는 개선되었고 얼핏 보기에 가치중립적인 표현인 듯하다. 그러나 ‘出兵’이란 말은 조선을 일본의 국내로 파악했던 일제시대에 사용되었던 용어다.

요컨대 ‘분로쿠·게이죠 역’이나 ‘朝鮮出兵’은 ‘명분 없는 침략전쟁’ 이라는 본질을 회피하기 위한 용어다. 한편 중국에서 부르는 ‘조선후원전쟁’(朝鮮後援戰爭), ‘임진위국전쟁’(壬辰衛國戰爭)’이나 북한에서 사용하는 ‘임진조국전쟁’도 충분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이다.

전쟁의 발생원인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후쇼샤판)는 임진왜란의 원인을 도요토미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아시아의 대제국을 세우려는 대의명분, 도요토미의 개인적인 망상만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일본 역사교과서는 임진왜란의 발발 원인을 소위 정명가도(征明假道)에서 찾고 있다. 즉 “명의 정벌을 위해 조선에 길을 빌린다”는 일본의 요구를 조선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 침략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일본 고교 ‘상설일본사’ 교과서에도 ‘秀吉의 대외정책과 조선침략’을 다루면서 “1587년, 히데요시는 쓰시마의 종(宗)씨를 통해서 조선에 대해 入貢과 명나라에 出兵하기 위한 선도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는 히젠(肥前)의 나고야(名護室)에 본진을 두고, 1592년 15만 여명의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文祿의 役)”라고 하여 마치 임진왜란의 배경을 입공(入貢)과 명 정복의 선도(先導)에 대한 조선 측의 거부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전쟁 발발의 실질적 동기인 일본의 국내적 요인, 예컨대 명과의 감합무역(勘合貿易) 부활, 諸侯들의 군사력과 불만의 해소 등을 대부분의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도요토미가 내세운 명분이나 개인적인 야망을 침략전쟁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을 은폐,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극소화할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를 전쟁 영웅, 일본 민족의 영웅으로 우상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
왜군의 침략 작전은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의 지휘 아래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방과 황해안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 시킬 수 있었다.

육지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왜군과 싸워 향촌 사회를 지켜냈다. 농민이 주축을 이룬 의병은 전직 관리와 사림 양반 그리고 승려들이 조직하고 지도했으며,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고 그에 알맞은 전략과 전술을 개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부대는 관군에 편입되어 조직화되었고, 관군의 전투 능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북한의 ‘조선력사’ 교과서도 우리 수군이 승리한 한산대첩, 부산대첩, 명량대첩, 로량대첩과 각지의 의병들의 투쟁, 평양성 해방전투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일본 고교 ‘상설일본사’ 교과서에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과 조선 의병의 저항, 명의 원군 등에 의해서 점차 전국이 불리하게 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명군의 역할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 관군과 백성들이 합심해 행주산성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이에 왜군은 서울에서 후퇴, 경상도 해안 일대에서 장기전에 대비했다.
중국의 사천출판사 ‘세계역사’(상책)교과서에는 “豊臣秀吉은 기회를 틈타 1592년(壬辰)에 출병하여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까지 침략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조선 군민들은 조국을 보위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섰고 명나라도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지원하도록 하였다.(壬辰衛國戰爭)”고 하여 중국침략의 위협을 느껴 원군을 보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인민교육출판사 ‘세계근대현대사’ 교과서도 ‘조선왕조 통치하의 조선반도’ 주제를 다루면서 “일본의 통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정복하려고 망녕되게 시도하면서 1592년과 1597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대거 진공하였다.

일본군의 1차 진공 때 조선군민들은 애국장군 이순신의 지휘 하에 일어나 항전하였으며, 명조에서는 조선의 요청에 응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원조하였으며, 조중군민들의 강력한 공격을 받은 일본침략군은 조선반도의 남부 연해일대로 패주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임진왜란에 대한 중국 역사 교과서의 내용은 전쟁의 성격 및 원인에 대한 기술을 생략하고 명군이 참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격파하고 실지를 수복한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다. 당시의 정세로 보면, 일본이 조선 정복에 성공한다면 전쟁은 자연히 중국으로 확대될 것이 명백했다.

당시 중국의 조선출병은 조선의 국난 극복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중국의 파병이 ‘중국의 자위 수단’인 측면도 있는데 ‘조선의 구원’으로만 서술하는 것은 중국 측 입장만을 내세운 것이다.

일본 세계사 교과서는 대부분 임진왜란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서술된 내용 대부분이 “명의 원조를 받아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혹은 “명은 풍신수길의 침입에 대한 원조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어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로 이루어져, 마치 임진왜란의 주체가 일본과 명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정유재란   경상도 해안 지방으로 밀려났던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휴전을 제의했다. 그러나 3년을 끌어오던 화의 교섭이 실패하자, 다시 침입해왔다.(1597). 임진년과 달리 이번에는 조선군도 군비를 잘 갖추고 명군과 협조, 왜군은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또 물러났던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어 명량 해전에서 왜군을 대파했다. 마침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전세도 불리해지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격멸하다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났다.
중국 세계근대현대사(상책) 교과서에는 “일군이 제2차 조선침략 시 명나라가 노장 등자룡(鄧子龍)을 파견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지원하게 하였다. 이순신과 등자룡이 지휘한 朝中軍隊는 재차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마지막 해전에서 이순신과 등자룡은 모두 장렬히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 해전은 일본의 침략 계획을 철저히 분쇄시켰다.”고 하여 이순신과 등자룡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전쟁 과정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한 의병들과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는 점은 종전에 일본군이 승승장구 조선의 전 국토를 휩쓸다가 히데요시의 사망과 함께 전쟁이 끝났다는 기술에 비해 개선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교과서가 여전히 히데요시의 죽음을 종전의 계기로 보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왜란의 결과, 영향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의 침략은 실패로 끝났다. 일본은 조선의 항복을 받지도 못했고, 영토를 얻지도 못했다.

북한의 중학교 ‘조선력사’ 교과서에는 임진조국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우리 인민들이 일본 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용감하게 떨쳐나섰으며, 리순신, 곽재우 등 애국 명장들의 역할도 컸다고”하면서, 승리의 역사적 의의로서는 “우리 나라를 강점하려던 일본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나라의 독립을 튼튼히 지켜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모든 인민들이 단결하여 결사적으로 싸울 때에는 그 어떤 원쑤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삼국은 승자·패자 할 것 없이 모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조선은 전쟁에 의해 전 국토가 황폐화되고, 막대한 인적자원이 손상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방대한 전비와 무모한 병력 동원으로 도요토미 정권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고, 명나라도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만주의 여진족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문화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활자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임진왜란은 침략 전쟁
임진왜란은 일본이 계획적이고 불법적으로 조선을 침략해 벌인 전쟁으로, 전쟁 당사자인 조선과 일본은 물론 명나라까지 개입한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을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즉 도요토미가 내세운 명분이나 개인적인 야망을 침략 전쟁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이다. 또한 자국의 입장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서술에서 벗어나 객관화시켜야 한다. 일본은 침략성을 분명히 서술하고, 그로 인한 조선인에게 피해를 준, 불행한 전쟁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 다음 회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어떻게 볼 것인가’ 입니다.

/이찬희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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