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예림이 오늘 몸이 아파서 못 온 게 아니에요."
방과후 빈 교실에서 자리를 정돈하던 나를 수경이와 다은이가 찾아왔다. 숨을 헐떡거리고, 눈에는 눈물을 방울방울 달고서. 설명을 늘어놓는 중에도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흘러 멈출 줄을 몰랐다.
"우리끼리 싸웠는데 화해 안 하니까 중간에서 스트레스 받아 안 나온 거예요."
다은이는 예림이가 보냈다는 문제의 문자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하, 너희들이 자꾸 이러니까 나, 정말 지쳐. 이제 그만 살고 싶다.’ 아이들은 예림이의 전화가 불통이라 너무 걱정된다고, 당장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 어떡해요. 예림이 잘못된 거면……그러면……그러면……어떡해요?"
아이들의 말을 듣는 그 순간, 12년 전의 아픔이 데자뷰처럼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잊은 줄 알았던 과거의 상처가 어느새 내 마음을 노크질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전화해 볼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휴대전화를 잡는 손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그러나 전화를 반복해 걸어도 예림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는 괜히 창가를 서성거렸다.
‘설마!’ ‘어쩌면!’ ‘이번에도?!’‘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돼.’
어느새 나는 치유되지 못한 과거의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 펑펑 우는 아이들을 달래 방과후 수업으로 돌려보낸 뒤 예림이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친구들의 대화와 메신저 내용을 공유하고 걱정을 전한 후 예림이 상황을 확인해 보십사 전달드렸다. 평소 사무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던 어머니였기에 통화가 조심스러웠지만, 아이의 생사가 걸린 문제에서 망설임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용기를 냈다.
"네……네. 알겠습니다. 저도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놀란 듯 흔들리는 어머니의 음성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예림이에게도 다시 전화했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잠시 화초를 훑던 눈길이 나를 12년 전의 교실로 옮겨 놓았다.
"빈 자리가 누구야? 은남이? 은남이가 안 온 거구나."
지각을 자주 하던 아이라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수업을 진행하려 하는데 은남이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쪼르르 내 주위를 에워쌌다. "은남이 집에 가봐야 돼요." "요즘 은남이가 자꾸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은남이는 강원도에 본가가 있는데,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피하고 상위 대학에 진학하고자 고양시에 전입한 아이였다. 근처 오피스텔을 구해 혼자 생활했기에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많았다. 불안과 걱정에 휩싸인 아이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이 무거웠다. 유명 배우가 자살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고, 수능이 한 달 남은 시점이라 조심스러웠다. 강원도 은남이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곧 어머니와 연결이 됐고, 은남이 오피스텔 근처에 사는 고모가 소재를 확인하러 가면서 모든 것이 일단락되는가 싶었다. 갑작스런 비보가 전해진 건 30분여가 흐른 시점이었다.
"선생님! 선생님……흑흑흑……우리 은남이 어떡해요……우리 은남이……"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가 격렬하게 흐느끼고 있었다. 고모가 발견한 은남이네 집에서는 TV가 지지직거리는 채 켜져 있고, 불을 밝힌 욕실에서 은남이를 발견했단다. 사인은 우울증이었다. 너무도 밝아 아이들을 이끌고 단합대회까지 주도하던 아이가 우울증이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 또 그 아이의 아픔을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나를 한없이 자책했다. 괴로웠다.
갑자기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에 나는 불현듯 현실로 돌아왔다. 예림이였다. "예림아!"
생각보다 예림이의 목소리는 밝았다. 코로나 유증상으로 등교가 중지돼 쉬고 있었던 예림이였기에 우선, 컨디션부터 확인했다. 친구들의 걱정을 전하고, 문자 메시지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대뜸 생각지도 않은 활기찬 대답이 돌아왔다.
"자꾸 시간 질질 끌면서 싸우는 게 너무 지겨워서 쓴소리 한 거에요. 빨리 화해하라구요."
이후 진행된 학부모 상담 전화에서 어머님은 그간의 고압적 자세에서 벗어나 보통의 어머님들처럼 자문을 구하며 한없이 미안해하고, 또 고마워하셨다. 상담과 약물 치료를 긍정적으로 병행해 보겠노라며 변화에 대한 노력을 약속하신 어머님을 안아드리고 싶었다. 큰 용기를 내시고 한 발짝을 뗀 어머님을 적극적으로 돕고 싶었다.
"어머님, 잘 이겨낼 수 있으실 거예요. 저도 함께할게요." 공감하고 연대하며 지지하는 그 에너지만으로도 충분히 하나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그날, 어머니와 나는 예림이를 함께 키우며 상호 도움을 나누는 조력자가 되었다.
학기 초 예림이는 잔뜩 위축되고 어두운 아이였다. 아무도 자신만의 동굴에 초대하지 않으려는 작은 세계의 은둔자. 학교에서 진행한 정서 행동 검사에서도 불안 및 우울 지수가 유의미하게 높은 수치를 보였고, 자해 시도까지 꾸준히 이어졌기에 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걸핏하면 점심을 거르고, 잠만 자는 등 무기력한 일상을 이어가던 예림이에게 내가 먼저 다가갔다. 예림이를 제2의 은남이로 만들 수는 없었다. 3월부터 시작된 원격수업에서 멈춰있는 때가 많았던 예림이는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였다.
"예림아, 수업 듣고 있니? 어디까지 들었어? 영어 과목이 미이수더라. 얼른 듣자."
"예림아, 정보 과제가 아직 미제출이네. 어려운 부분이 있니? 도와줄까?"
수시로 전화하고 점검해야 할 정도로 예림이의 자기주도학습이나 자기관리 능력은 엉망이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으로 만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예림이와 나는 지시, 전달만 있는 건조한 관계가 되어갔다. 나는 제대로 적응 못하고 학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예림이를 돌보느라 지쳐갔고, 때로는 화도 났다.
‘얘는 뭐가 문제야? 왜 이렇게 불성실한 거지? 도대체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해?’
우울 성향이 높아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학생에 대한 높은 기대와 규범적 가치관은 독촉으로 이어졌다. 미이수 현황을 읊어대고, 아이와 신경전을 지속하며 감정싸움으로 이어가기 일쑤였다. 정작 중요한 아이의 마음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건, 자해 흔적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잊고 있었던 은남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 오는 것 같았다. "나의 마음을 봐 주세요."
나는 그때부터 예림이의 말 상대가 되기 위해 스스로 수다꾼이 되었다. 수시로 전화하고, 예림이의 일상 속으로 다가갔다. "오늘 기분은 어때?" "예림인 네일아트 잘 하니까, 선생님 손도 한번 봐 주라." "어떤 스타 좋아해?" 정서적 안정을 주며 친밀감을 쌓으려 노력했더니 예림이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조그만 LED 전광판에 ‘선생님 사랑해요’를 띄워 놓고 큰 소리로 "선생님 사랑해요"를 외치기도 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모습이 낯설고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만큼 예림이는 밝아져 있었다.
부모님의 늦은 귀가로 밤 늦게까지 동생과 단 둘이 있어야 했던 예림이. 그마저도 남매 지간이 서먹해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었다. 외로울 때마다 붙들고 있었던 휴대전화는 중독 수준이었다. 자해를 할 때마다 해방감을 느꼈다는 말을 통해 나는 예림이의 새로운 세계를 엿보았다. 여유를 찾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가자 아이도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는 쉬는 시간, 점심시간, 방과후 짬짬이 만나며 관계의 밀도를 높여갔다. 예림이는 자신의 일상을 참새처럼 종알거리며 즐겁게 들려주었다.
나는 예림이가 학교 내 위 클래스에서 연계 상담을 받도록 이끌었다. 지금, 예림이의 모습은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교우 관계도 원만해졌고, 방과후 댄스반 수업도 수강할 정도로 학교 생활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관계가 편해지고, 삶의 활기를 찾게 되자 자연스럽게 교과 학습도 안정되어 갔다.
이 모든 것은 함께 해 주신 우리 교육 공동체의 힘이다. 예림이가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로 나를 충격에 빠뜨린 그날, "선생님은 괜찮아요?"라고 물어봐 주시며 걱정해준 상담 선생님, 예림이의 근황을 체크하며 "함께 할게요"라고 동참 의사를 밝힌 교감 선생님, 고민을 적극 나눠 주신 동료 선생님들 덕분에 나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12년 전 담임 학급에서 발생한 자살 사고에 대해 모두가 쉬쉬하는 분위기 속에서 무관심과 오해가 불러온 수많은 말, 말, 말. 그 말들 때문에 참으로 아픈 시간을 보냈다.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으며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던 그해 겨울은 퍽 추웠다. 아이를 보내며 울었고, 차가운 시선 속에서 두 번 울었다. 그런데 지금, 내 손을 따숩게 맞잡아주는 선생님들이 있어 힘이 난다. 예림이의 웃음을 지켜주고픈 건강한 에너지가 내 안에서 힘차게 꿈틀댄다. 예림이 덕분에 함께 치유되어 가는 느낌이다. ‘다시는 널 놓치고 싶지 않아. 예림아. 너까지 잃을 수 없어. 외롭게 하지 않을게.’
나는 이제야말로 비로소 12년 전의 까마득했던 상처로부터 치유되는 느낌이다. 내가 돕고 있다고 생각한 예림이에게 나 역시 도움을 받고 있음을 느낀다. 치유의 기회를 제공한 예림이에게 한없는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사랑스러운 예림아, 우리 함께 행복해지자. 우리, 손 맞잡고, 잘 극복해보자. 그리고 일상의 행복을 마주하면서, 삶이 생각보다 괜찮은 거라는 거, 조금씩 함께 발견해 보지 않을래? 우린 모두 소중한 사람이니까. 지금 이 순간 너, 참 사랑스러워. 그리고 선생님도 그렇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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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소감] 작은 불꽃 모여야 불 지필 수 있어
글을 쓰며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교육이란 불을 피우는 것이 아닐까요. 기꺼이 함께 나누고 배우려는 마음! 개개인의 불꽃이 모여야 뜨거운 불을 지필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하는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 덕분에 깨닫곤 합니다. 그리고 그 불은 ‘함께’와 ‘같이’의 가치, 집단지성과 공동체 정신을 발휘할 때 더욱 흔연히 일어날 수 있는 불꽃의 집합체임을 믿습니다.
교단에 서는 저의 하루하루는 수없는 관계에 직면하는 도전의 시간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바람이 불어 힘든 날도 있지만 바람이 불어 더 좋은 날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관계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만날 때, 시간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요.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마음 속 상처를 담아두지 않고 흘려보내는 연습을 하면서 다양하게 아이들을 만나 보니 어느새 아이들은 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행복은 언제나 제 가까이에 있었어요. 오늘도 저는 저에게 주문을 겁니다. ‘괜찮아. 잘 하고 있어.’ 겨울을 이기고 다시 봄바람이 불면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우리 선생님들 모두가 교단에서의 일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길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