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수기 동상] 천천이와 함께 춤을

2021.12.06 17:05:36

 

하늘이 말갛게 갠 가을날, 기다란 둑길 따라 죽 늘어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천천’에 들어섰습니다. 천천. 하늘 천에 내 천.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하늘내’입니다. ‘세상에는 참 이쁜 이름을 가진 고장이 있구나!’ 했습니다. 후에 들으니 산지가 높아 하늘을 찌르는 형국으로 물줄기가 하늘에 닿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드높은 곳이어선지 찌는 듯 불볕더위엔 아랑곳없이 지내지만, 겨울은 남쪽 지역에선 기온이 가장 낮아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견뎌야 합니다. 산이 깊어 골골이 연출되는 절묘한 구름의 파노라마는 덤으로 누리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조금 먼발치 떨어져 주변과 어우러진 학교 전경을 볼라치면, 너무 평화롭고 잔잔하여 문젯거리라곤 손톱만치도 없어 보입니다. 하나 정말로 그리하다면 이 세상살이가 아닐 겁니다. 마치 고고한 자태로 수면에 떠 있는 백조의 부단한 물밑 발짓처럼, 여일한 일상 가운데 곧잘 마주치는 크고 작은 문제와 숙제들에 마음 졸이며 뒤척이기 일쑤니까요.
 

매일 아침 등굣길, 교문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일단 운동장을 두어 바퀴 천천히 걸어 돌고서 교실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항상 맨 나중에 젖은 머리인 채, 운동장도 돌지 못하고서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들어가는 아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여러 날 지켜보다 담임선생님께 여쭈니 ‘서영채, 우리 학교에서 제일 마음을 써야 할 아이’라 말합니다. 가정이 해체되면서 도시로 나갔다가 다시 시골로 돌아와 할머니와 함께 지내는 아이로, 감정의 기복이 날씨 변화만치 심하다 합니다.
 

점차 아이들이 모인 속에서 늘 볼 빨간 젖은 머리 영채를 찾게 되고, 어쩐 일인지 아이들과 섞이지 못한 채 겉도는 아이의 그늘진 모습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때때로 친구들과 있기보다는 선생님 곁을 더 맴돌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하교 후 길에서 펑펑 울고 있다는 제보에 한달음에 달려나갔지만, 못 만나고서 걱정만 안고 돌아왔는데,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젖은 머리로 해맑게 나타나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습니다.
 

그랬던 영채의 머리가 갑자기 고슬고슬해졌습니다. 긴 머리를 말리지 않고 오니 냄새가 난다며 아이들이 더 거리를 두기에 선생님께서 강력 헤어드라이어를 선물했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채와 아이들의 거리가 좁혀진 건 아닙니다. 한 번 벌어진 틈은 자꾸만 벌어져 결국 표면에 모습을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이를테면 자유 조별 수업의 경우 여학생 모두가 한 테이블에 앉고 영채 혼자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겨지는 바람에 선생님이 개입하여 억지로 조를 재편성해야 하는 상황이 이런저런 활동 중에도 빈번히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지못해 꼴찌로 느릿느릿 오던 아이가 점점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둘러대며 핑곗거리를 찾아내어  결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영채에겐 학교가 단지 오기 싫은 곳 정도가 아닌, 너무나 괴롭고 힘겨운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미묘한 여자아이들의 갈등 상황에서 어른들의 섣부른 개입 역시 무척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선뜻 개입하여 화해나 사과를 유도했다가 겉으론 됐다 싶었지만, 풀리지 않은 마음이 되레 덧나 역효과가 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아이들의 행복한 학교생활을 위해 모든 선생님이 나서기로 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여러 차례 머리를 맞대고 많은 정보를 수집하며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틈의 시작은 의외로 골이 깊어, 초등학교 때부터 묵혀온 감정의 고리가 사단이었습니다. 시골 소수의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한동네에서 쭈욱 같이 자라 같은 유치원에,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까지 줄곧 함께입니다. 끈끈하게 좋을 땐 한 없이 좋지만, 한 번 상처를 입거나, 관계가 틀어지면 계속 함께 가야 하는 입장에서 엄청난 괴로움이 됩니다. 그래서 그 힘겨운 마주침을 피하고자 아예 딴 곳으로 이사까지 가는 안타까운 일도 있습니다. 요번 일도 그와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초등학교 때의 영채는 활발하고, 춤도 곧잘 추고, 주장도 강하고, 에너지도 넘쳐 친구들에게 함부로 거칠게 대하기도 하고, 더러 소외시키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젠 그런 게 잘 통하지 않게 된 데다가, 상황마저도 확 달라져 그때와 정반대의 입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선 시시비비를 가린다거나 눈에 띄는 직접적 개입은 배제키로 했습니다. 그보다는 서서히 시간을 두고 에둘러 접근하여 아이들의 건강한 생각과 마음을 튼튼히 키워 자신들의 상처도 치유하고 친구에게도 너그러워지도록 하는 간접적인 개입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잘 알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하며 실마리를 풀어 이끌어내 주실 좋은 전문가 선생님도 어렵게 모셨습니다. 여러 달 지속적으로 자체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서 마친 후엔 전문 선생님과 전체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의견을 교환하면서 지도 방향을 조금씩 수정해 나갔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교과 융합 수업을 통해 몸으로 부대끼며 함께하는 공동체 어울림 활동을 끊임없이 병행하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삼겹살 파티도 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나마 조금 누그러져 보인다 싶던 어느 날 아침 일입니다. 역시 맨 꼬리로 터벅터벅 등교하는 영채의 뒤를 앙상하게 마른 노랑 줄무늬 고양이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영채도 싫은 눈치가 아닙니다. 내가 다가가도 다른 길고양이와 달리 사람을 피하지도 않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눈에선 진물이 흐르고, 목 언저리는 상처가 심합니다. 안쓰러운 마음에 가진 먹거리를 조금 주니, 좀 경계하면서도 날름 잘 받아먹습니다. 그게 끝이려니 여겼는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떡 하니 진입로 한가운데를 통과하여 등교하듯이 나타납니다. 하는 수 없이 아예 고양이 먹이를 준비해 교정 뒤편에서 주기 시작했습니다. 어쩔 땐 일찌감치 와 기다리다 멀리서도 내 차를 단박에 알아보고 막 달려 나오기도 합니다. 때마침 캣맘이신 순회보건 선생님이 오실 적마다 고양이의 눈과 상처를 치료하시고 항생제도 주십니다. 쉬는 시간이면 영채랑 아이들도 하나둘 간식을 가져다주면서 놀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와 장난하며 노는 그때만큼은 적어도 어떤 가식도 흉허물도 없이 순수하게 모두가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천천이’. 아이들이 붙여준 녀석의 이름입니다. 유연한 움직임의 천천이를 중심으로 흔들이 장난감을 요리조리 흔들며 경쾌하게 뛰노는 아이들 모습은 꼭 까르르 웃음소리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며 원무를 하는 것만 같습니다. 아이들도 생명이 있는 무언가와 교감을 하며, 돕고 나눈다는 사실이 뿌듯한가 봅니다. 어찌 보면 천천이를 거두어 돌보며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천천이로부터 더 많은 즐거움과 위로를 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내친김에 아이들과 함께 박스 두 개를 겹쳐 앞쪽에 둥근 출입구를 내고, 푹신한 캥거루 그림 양털 방석을 깔아 집도 마련하여, 볕이 잘 드는 한적한 곳에 놓았습니다. 지난여름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연일 퍼부어댄 폭우로 인해 천천이의 집도 그만 폭삭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스티로폼 상자로 약간 높여 안전장치를 하고 재건축을 해야 했습니다. 어떨 땐 들고양이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천천이가 온몸에 물리고 할퀸 선명한 상처를 내고서 절룩거리며 나타나 울상이 된 아이들이 캣맘 선생님께 긴급출동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모두의 사랑 속에 깡말랐던 천천이는 비록 한쪽 눈은 잃었지만, 제법 살이 오르고 귀여운 본모습을 회복하면서, 학교 귀요미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때마침 ‘우리 학교’를 주제로 하여 교내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국화꽃 만발한 교정 사진, 학교급식 상차림 사진, 아름드리 우뚝 솟아 정렬한 전나무들, 기타 등등의 사진들 가운데 학교 한구석을 차지한 천천이 모습도 앵글에 포착되어 떡하니 걸려있습니다. 손뼉을 치며 다가가 보니 제법 많은 심사스티커가 붙어있습니다. 천천이는 이제 어엿한 우리 학교의 일원이자 인기 최고 마스코트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의 얼었던 마음을 따스하게 녹이는데 천천이의 온기도 조금쯤 보탬이 된 듯합니다.
 

11월 초. 학생의 날 행사를 간단히 마치고, 학생회에서 선생님께 감사의 이벤트를 준비했다며, 자신들이 직접 만든 향초와 선생님 특징 잡은 얼굴을 그린 그림 위에 간단한 감사의 메시지를 적어 부끄럼 빛내며 전해주었습니다. 커다란 꽃바구니 한가운데엔 ‘선생님들은 좋겠다. 우리가 제자여서’란 깜찍한 메모가 꽂혀 있습니다. 이렇듯 아이들은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 산골의 자연과 동물과 선생님을 사랑하며 저마다 제 빛깔에 맞는 마음 바탕을 채색해가고 있습니다. 
 

"요즘 학교생활 어떠하냐?"는 물음에 "나쁘지 않습니다"라 답하는 영채는 오늘도 ‘천천이와 함께 춤’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고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정말이지 천천골엔 천천이와 함께 춤을 추는 아이들이 있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나의 길고 길었던 교직 생활도 이제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이 끝자락에서 만났던 영채를 비롯한 착한 악동들, 또 천천이와 이곳의 풀 한 포기까지도 아주 오래도록 그리워할 것입니다 .

 

--------------------------------------------------------

 

<수상 소감> 소중한 순간들에 안녕을 고하며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글로든 사진으로든 남기고 싶은 삶의 얼굴이 있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저도 긴 교직 생활을 마감하며 이 마지막 무대에서의 따스한 이야기를 그저 시간 속으로 흘려보내기 아쉬워 마무리하듯 글로 적어 보았습니다. 뜻밖에 당선의 선물까지 뒤따라 기쁨과 함께 감사한 마음이 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육 현장에서 동행했던 선생님들, 반짝이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수많은 일이 영화 속 장면들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참으로 귀한 시간을 고마운 분들에 힘입어 행복감 많이 느끼면서 지내 온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소중했던 순간들에 안녕을 고하며, 이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의 애정을 담아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유재이 전 전북 천천중 교장
ⓒ 한국교육신문 www.hangyo.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 문의 : 02) 570-5341~2 광고 문의: sigmund@tobeunicorn.kr ,TEL 042-824-9139, FAX : 042-824-9140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 등록번호 : 서울 아04243 | 등록일(발행일) : 2016. 11. 29 | 발행인 : 문태혁 | 편집인 : 문태혁 | 주소 : 서울 서초구 태봉로 114 | 창간일 : 1961년 5월 15일 | 전화번호 : 02-570-5500 | 사업자등록번호 : 229-82-00096 | 통신판매번호 : 2006-08876 한국교육신문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