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의 수도승

2022.09.14 16:28:39

느리게 조용하게 단순하게

요즈음 나의 배움의 대상은 우리 집 반려묘다. 조용하고 단순하게, 느리게 사는 모습은 녀석의 전생이 수도승이 아닌지. 나는 녀석을 기르며 인간은 평생 동안 공부를 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만큼 불완전하게 태어난 존재라는 뜻이다. 내 곁에서 존재만으로도 사랑을 듬뿍 받고 사는 우리 집 고양이에 비하면 그렇다. 녀석은 생이지지(生而知之: 태어나면서 아는 자 )로 사는 게 분명해 보인다. 녀석들은 가정교육을 하는 것도, 고양이 학교도 다니지 않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배워도 생이지지의 단계에 이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배워서 아는 자(學而知之 학이지지)가 되면 최상의 복을 받은 사람일 것이요, 곤란을 겪으면서 배우는 자 (困而知之곤이지지)라도 되면 그야말로 다행이다. 불행하게도 인간 세상에는 곤란을 겪으면서도 배우지 않는 자(困而不學 곤이불학)가 넘쳐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러니 인간은 가장 손길이 많이 가는, 비용이 많이 드는 존재가 아니던가.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그의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형질을 바탕으로 약간의 적응 과정만으로도 불편함 없이 잘 살고 있으니, 그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저 수준으로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고 가성비가 아주 좋은, 지구를 오염시키지 않고 에너지를 소진시키지도 않으며 살아가니, 인간이 그들에게 배울 덕목이 아주 많다. 말그대로 자연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자기의 본 모습조차 갈아엎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가! 가난한 내면을 명품으로 치장하고도 허덕이며 사는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 사는 저들보다 더 나은 게 무엇일까.

 

살아 있음만으로도, 약간의 먹이와 쉴 곳만으로도 집사를 행복하게 해주는 묘한 매력을 지닌 생명체인 우리 집 고양이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교배된 종의 특질 덕분인지 온순하고 차분하다. 오로지 인간을 위해 태어난 게 분명해 보인다. 녀석보다는 조금 더 나은 것 같은 나에 비해 편안하게 묘생을 즐기고 있으니, 나보다 더 진화된 생명체가 아닐까 자문하곤 한다. 녀석이 나를 부러워할 일은 없겠지만. 아니, 오히려 나를 불쌍히 여길 지도 모른다. 뭘 그리 많이 먹고, 가지려 하고 아등바등 사느냐고, 남은 날이 결코 많지 않다고,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시간이 없다고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우리 집의 반려묘는 스코티시폴드다. <장화 신은 고양이>의 모델로 알려진 종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녀석의 외모에 반해서 사들였다. 자신을 간택해달라고 야옹거리던 커다란 눈빛, 귀여운 외모가 한몫 했다. 그러니 외모지상주의는 사람에게 한정된 말이 아님이 분명하다. 눈이 즐거운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 적게 먹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명상과 낮잠으로 소일하는 저 작은 수도승은 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스승이 분명하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녀석과 노는 시간이 더 즐거워졌으니 큰일이다!

 

조용하고 순하면서도 자신의 영역은 확실히 고수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끔 즐거운 상상을 한다. 혹시, 조선의 선비가 환생한 것은 아닌가 하고.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사람보다 훨씬 신사적이고 깔끔한 매너까지 겸비한 공동생활의 미덕은 누구한테 배운 걸까? 인간은 가정교육, 학교 교육을 거쳐 수십 년 배워도 깨우치지 못할 태도를 지녔으니. 

 

그뿐만이 아니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태도도 보통이 아니다. 집사가 일을 할 때면 가까이 다가와서 가만히 지켜봐주곤 한다. 마치 '당신 곁엔 언제나 내가 있으니 언제든 위로를 받으라'고 하는 것처럼 늘 눈을 맞추고 쳐다봐준다. 녀석은 나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곁에 있어주고 반가움의 표시로 꼬리를 들고 와서는 가볍게 비비는 정도일 뿐이다.

 

때로는 알아 듣지 못할 소리를 하며 벌러덩 드러누워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린다. 녀석과 나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지만 늘 서로를 아끼고 좋아한다. 가장 좋은 관계는 침묵으로도 통하는 사이다. 굳이 언어라는 형식을 갖추지 않으니 오해하는 일도 없다. 그럼에도 과도하게 껴안을 땐 여지없이 하악질로 확실한 의사표현을 한다. 선을 지키라는 것. 녀석이 하악질을 한다고 우리 사이가 나빠지진 않는다. 오히려 조심해주고 존중해주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성희롱, 성추행, 갑질 등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주 강력한 의사표시를 못하고 미적거리다 사건이 되는 수가 허다하니.

 

나는 요즘 우리 집 고양이에게 배운 관계 맺음의 지혜를 따라 하는 중이다. 언제든 잠행모드를 취하거나, 휴대폰을 꺼두고 자유 시간 즐기기 등, 원치 않는 소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을 늘리는 중이다. 나도 녀석처럼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휴대폰을 끄고 조용히 지낸다. 놀랍게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만큼 내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음을 깨닫는다.

 

녀석은 언제든 취침 시간이면 잠행모드에 돌입한다. 쉬고 싶을 때는 철저히 은신처로 숨는다. 건드리거나 불러내지 말라는 신호이니 놀고 싶어도 참는다. 같이 살되 홀로 있는 시간을 존중해주라는 신호이니 기꺼이 참아준다. 한 발 더 나아가 가족끼리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께 살되 따로 지내는 시간을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함을 녀석에게 배운다. 자연을 닮은 녀석은 존재 그대로를 소중히 아끼고 사는 내 곁의 수도승이다.

 

하루 중의 대부분을 잠을 자고 쉬며 생존 에너지를 함부로 쓰지 않는 지혜로움까지 갖춘 녀석에게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배운다. 무소유를 실천하고 도를 닦으려고 일부러 출가를 하지 않아도 녀석 곁에서 나는 도시 속 아파트 숲에서 출가승이 되곤 한다. 녀석 덕분에 나의 절대 시간은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하루가 길어졌고 명상 시간이 늘었으며 조용하고 단순하게, 느린 삶을 누리게 되었으니.

 

녀석과 나 사이의 언어는 최소한에 그친다. "꿈아, 냠냠 줄까? 꿈아, 애착인형 줄까? 꿈이, 사랑해! 세수할까?" 우리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이니 말이다. 눈빛만 보고도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으니. 몸짓언어의 위대함은 종을 뛰어 넘기에 충분하다. 언제든 조용히 곁에 와서 시간을 함께 나눠주는 녀석의 담담한 몸짓, 부드러운 눈 키스는 침묵의 위대함, 거의 모든 순간을 명상하듯 보내는 수도승 같은 모습이 주는 편안함을 배우는 중이다.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의연함을 배우게 한 내 어린 왕자에게 감사한다.

 

인간 세상에 문제가 많아진 것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화에 치중하며 상대방을 구속하려는 데서 오는 건 아닐까. 몸짓언어와 눈빛을 읽어내지 못하는 인간관계는 고양이와 사는 것만큼에도 이르지 못함이니, 어찌 사람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을까. 그많은 심리학 서적과 성공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안겨주었으니. 물러섬과 적당한 거리 두기, 무심한 듯 배려하는 미덕을 알게 한 고마운 존재이니, 오늘 나는 고양이 숭배자가 된 듯하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처럼!

 

세상은 초고속으로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마음의 벽은 더 두꺼워졌다. 그러니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에게서 더 위로를 받고 아끼며 좋아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반려동물을 기르며 치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녀석과 나는 다툴 일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녀석에게 잘 보이려고 애교를 부리는 쪽은 내 쪽이다. 새침한 녀석이라 최소한의 스킨십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일 듯 말듯 늘 가까이에 머무는 녀석의 시선을 느낀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는 모습은 스토킹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다.

 

영역동물인 고양이는 집콕이 특징이다. 그러니 녀석을 두고 오랜 시간 외출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홀로 두어도 괜찮다는 세간의 일설은 분명히 오해다. 4시간이 넘으면 외로워하고 사람처럼 우울해한다고 한다. 함께 살기 위해 선택한 녀석이니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줄 책임이 나에게 있다. 어린 왕자가 자신에게 길들여진 장미에게 책임을 느끼듯 녀석은 나에게 어린왕자의 장미인 셈이다.

 

오늘도 나의 하루는 느리고 조용하게, 단순하게 내 곁의 수도승처럼 살기로 다짐한다. 녀석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은 다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휴대폰을 끄는 일이다. 아무 때나 울리는 알림 문자나 스팸 전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소식에 일희일비 하지 않으니 시간이 늘었다. 유한한 세상에서 절대 시간을 늘리는 최상의 방법은 미디어와 휴대폰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과학문명은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어서 시간을 만들어주었건만, 역설적으로 끌려다니며 살게 되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걸 알기라도 한 듯, 음악에 취해 살포시 잠든 녀석을 쓰다듬으며 나도 행복한 아침을 시작한다. 

장옥순 작가, 전 초등 교사 jos2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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