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나랑 싸운다. '날마다 새날이라고 속삭이는 나'와 '그날이 그날이라고 속살대는 나'와 싸운다. 그러다가 오늘도 하루만 열심히 살아내자고 다독이며 나를 일으킨다. 같은 자리를 같은 속도로 맴도는 팽이처럼 지루하게 계속되는 오늘이라는 놈과 싸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순간은 엄청난 기적의 순간이다. 지구라는 비행물체는 이 순간에도 광활한 저 우주의 은하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주궤도를 순항 중이니.
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점을 찾아낸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감정에 마음을 맡긴다. 그런 다음 그 감정을 다스리는 청소를 시작한다. 지난 밤 쌓인 먼지를 닦아내듯 감정청소를 한다. 감정도 날마다 청소를 해서 햇볕에 널어 말려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게 살 수 있으니. 마치 지난 밤 나의 뇌가 생각과 기억 창고를 부지런히 정리하고 청소하듯이.
인간의 뇌는 깨끗한 상태를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질서정연한 것도 매우 좋아한다. 마치 목욕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이는 피부자아가 느끼는 행복이다. 그러니 그 사람의 정신 상태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모습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의 뇌는 매우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며 가소성이 높은 최고의 컴퓨터다. 뇌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쉼 없이 일하는 부지런한 조직이다.
자기 주변을 늘 어질러놓고 살게 되면, 종국에는 저장강박증에 시달려서 헤어 나오지 못해 심리 치료가 필요한 상태에 이른다. 본인조차 알지 못한 상처 받고 누적된 말 못할 어떤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 쓰레기가 분명히 있으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삶은 뇌가 사는 것이 아니던가. 현대 의학은 뇌과학의 시대를 열어서 뇌의 신비에 한 발 다가섰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는 뇌는 순수한 감동을 좋아한다. 이른 새벽 명상에 잠기거나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일, 기쁨과 깨달음을 안겨주는 책을 읽는 일, 눈이 시원하도록 깨끗한 방, 고양이의 가르릉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처럼 작은 노력으로 충분하다. 반대로 시끄러운 음악이나 소음, 불결하고 정리되지 않은 방, 널브러진 물건, 책을 읽지 않아 신선한 자극이 없는 삶은 뇌를 힘들게 한다. 거기다 과도한 스트레스와 감정노동으로 과부하가 걸리면 헤어나오기 힘든 상태가 되고 만다.
정년 퇴직과 거의 동시에 뺄셈 인생을 시작했다. 그것은 그동안 수고하고 지친 뇌를 위하는 일이고, 요즘 화두인 탄소 중립 생활이기도 하다. 인연의 가지를 정리하고 물건에 집착하지 않으니 마음 공간이 더 넓어지는 듯하다. 이제는 나누고 버릴 것만 남은 인생이다. 말 그대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정신적 갱년기가 분명하다. 일도 줄이고 소비도 줄이고 관계도 줄이다보니 어느 순간 도시 속에 사는 출가승처럼 홀가분해졌다.
나이 탓인지 새벽 3시에 잠이 깨곤 한다.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 30분을 넘기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한다.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버리고 치우는 일이다. 오래된 책이나 옷가지를 분류해서 내놓거나 잡동사니를 치운다. 새 물건인데 한 번도 쓰지 않은 생활용품은 재활용으로 내놓는다. 만약 사용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수거해서 버릴 생각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쓸모 있으니 다행이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땀으로 범벅이 된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먼저 새벽에 들어온 신문을 읽고 스크랩 하고 글감 상자를 열고 아이디어를 추가한다. 생각도 채소 씨앗을 심은 밭이랑처럼 자주 들여다봐야 자란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시각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날마다 무얼 버릴 것인지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두고두고 쓸 것처럼 여기저기 공간이 있는 곳마다 채워놓은 잡동사니들이 내 잠을 방해한다. 치워달라고, 제발 좀 버려달라고 아우성이다. 잘 버리는 것은 감정 쓰레기를 치우는 데 기여한다. 말끔해진 공간을 보는 것은 목욕하는 것처럼 상쾌함을 가져와서 뇌를 즐겁게 한다.
나는 책과 옷을 버리지 못해서 골머리를 앓는다. 버리기 전에 한 번 더 읽어보다가 다시 책꽂이로 직행하는 책들. 필시 문자중독이다. 저 책을 사들이며 좋아했던 그날의 기억들, 방마다 들어찬 책들을 보며 포만감을 느끼던 시간들이 추억으로 일렁여서 차마 내놓지 못한 나의 벗들. 심지어 월간잡지마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옷을 버리는 일은 더 어렵다. 십대 후반 주경야독 시절에는 한여름에 옷 한 벌로 지냈다. 돈이 생기더라도 옷보다는 책을 먼저 샀다. 저녁에 손빨래를 해서 연탄불 위에 옷걸이를 걸어 말린 옷을 다음 날에 입었다. 그러니 옷에 대한 집착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라 저장강박이라고 스스로 진단한다. 출근할 일이 없어진 지금은 편한 복장을 선호하다보니 입는 옷이 정해졌다. 최대한 시원하고 편한 옷으로.
며칠 전에는, 비싸게 샀는데 쓰지 않고 오래 묵혀둔 스테인리스 냄비를 재활용으로 내놓으려다 참았다. 철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았더니 환골탈태를 했다. 닦는 동안 내 마음 속 감정 찌꺼기도 닦이는 듯한 상쾌함이 밀려왔다. 원재료(본질)가 좋아서인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원래의 상태를 찾는 모습에 깨달음이 밀려왔다.
사람도 본디 심성이 착한 사람은 잠시 실수를 했더라도 대오 각성하도록 철수세미로 닦아주는 스승을 만나면 본래의 인격을 찾을 수 있다고! 그것이 바로 교육의 힘이고, 교육자의 사명이 아니던가! 그러니 함부로 속단하거나 판단하여 평가 절하하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고! 그러니 실패자가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많은 시스템이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이다.
알루미늄 냄비는 상하여 녹이 슬면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 독성물질이 나오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새것이라도 알루미늄 냄비의 속성을 숨길 수 없으니 사용하면 안 된다. 속된 말로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도 그런 사람도 있음이 사실이다.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는 태어날 때부터 알루미늄 냄비이니 조심해야 한다. 스테인리스 냄비를 닦듯 문지르면 인체에 해로운 환경오염 물질이 나온다. 그러니 사람 보는 눈을 가져야 다치지 않는다. 알루미늄 냄비도 요긴하게 쓸 수 있듯, 사람도 가려 쓰거나 상담과 치료로 좋아질 수 있으니 버리는 게 상책은 아니다.
인간은 장점보다 단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백지에 찍힌 까만 점에 더 눈길을 주는 것처럼. 인간의 문명이 발달했지만 아직도 미진한 부문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의학의 발달이 눈부시지만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를 고칠 수 있다는 보고는 없는 듯하다. 조심하거나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경고성 충고가 대부분이니.
그럼에도 완벽한 인간도, 완전한 인간도 없음을 상기한다. '악의 평범성'을 생각하면 그렇다. 누구든 절박한 상황이나 비본래적 절망(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데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 키에르케르)에 이르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으니. 매우 이성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치명적인 단점을 노출하여 걷잡을 수 없는 사고를 일으키지 않던가.
죽음은 순도 100%를 지니고 태어난 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덧셈이 최선인 양 더하기만을 배우고 쌓고 소유하며 오르기를 지향해온 인생길. 날마다 버리고 정리하며 뺄셈 인생을 향해 내려가고 있지만 마음 어딘 가에 남아 있는 삶의 찌꺼기와 묶은 때를 완전히 벗기는 일은 숙제가 분명하다.
아무리 닦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될 리 없다. 더 열심히 살지 못한,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 일들, 다 갚지 못한 은혜들, 해소하지 못한 그리움, 전하지 못한 사랑까지도 짐이 되어 한숨으로 다가온다.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저지른 잘못과 실수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놀라곤 한다.
태어나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을 우리 집 고양이가 부러운 순간이다.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삶으로 부질없는 욕심과 소유의 늪에서 허덕이다 미망에서 깨어나는 듯한 요즈음, '버릴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고 한 어느 작가의 고백이 부럽다. 아직도 나는 뺄셈 인생을 실천하는 데 미련이 많으니.
뺄 것이 하나도 없이 자기 몸 하나로만 살아도 넉넉한 우리 집 고양이를 모델로 삼은 뺄셈 인생이 성공하기를! 빈 몸으로 태어나 힘들게 얻은 소중한 것들이 덧셈 인생이었으니 본래 내 것이 아닌 것을! 그러니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낙담하고 절망하지 않아야 성공하는 뺄셈 인생이리라. 내 몸도 인연도 물질도 본래 내 것은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