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민음사 펴냄
1770년 5월 16일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철없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는 결혼했다. 당시 유럽 왕가의 결혼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들의 결혼은 다분히 양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략결혼이었다. 틈만 나면 자물쇠를 만들면서 소일하던 루이는 당시 15세였고 착하고 정이 많지만 산만하며 사려 깊지 못했던 신부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이야말로 세기의 결혼이라고 부를만했다. 루이 15세는 황녀를 맞이하기 위해서 사람이 살짝 당기기만 해도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굴러갈 것처럼 보이는 호화스러운 수십 대의 마차와 온갖 보석으로 치장을 한 예복을 준비했다.
합스부르크 공국도 이에 질세라 사치스러운 혼수를 준비했다. 프랑스로 시집가는 황녀를 수행하기 위해서 동원된 340필의 기마행렬이 프랑스 국경 근처에 접근했을 때 라인강 줄기의 한 조그마한 모래섬에서는 나라 안의 내로라하는 목수와 실내 장식공들이 마무리 망치질에 여념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공주를 영접하는 행사를 어디에서 치를지를 두고 양국 간의 치열한 논쟁이 오가다가 결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 낙점됐다. 오스트리아 황녀 신분에서 프랑스 왕세자빈으로 신분이 탈바꿈될 이 역사적인 행사를 치를 목조 건물은 당연히 초호화판으로 지어졌다.
이 엄숙하고 화려한 건물에 감히 평민 따위가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지만 은화 몇 닙은 파수꾼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 수 있었다. 용기 많고 호기심 많은 독일의 대학생 몇 명이 행사가 열리기 며칠 전에 이 세기의 현장에 숨어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생 무리 중에서 유난히 키가 크고 남성미가 넘치는 천재가 건물을 장식한 예술품에 취해서 동료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의 감동은 금방 분노로 바뀌었다. 벽에 장식된 그림이 ‘불행한 결혼에 관한 전설’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솜씨만 뛰어날 뿐 그 그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고 있는 인부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 이 청년은 분노했고 절망했다. 이 청년의 불길한 예감은 불행하게도 그대로 실현돼 버렸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인 결말을 일찌감치 내다본 이 천재의 이름이 ‘괴테’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그 괴테.
세기의 결혼이 치러진 지 5년 뒤인 1775년 괴테는 그 천재성 때문에 빛과 어둠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당시 라이프치히 법정은 ‘자살을 부추기고 선량한 독자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라는 이유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인쇄, 홍보, 판매를 금지했다. 법정은 괴테의 문장이 ‘기지가 넘치고 섬세하여’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위험한 책이라고 판단했다. 괴테는 그 천재적인 재능으로 명작을 썼지만 같은 이유로 위험한 책을 쓴 작가가 된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1774년 출간되자마자 지역 신문사는 ‘불온한 책으로부터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해야 하므로 정부에서 하루빨리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독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 책을 비판하는 신문 기사가 나올수록 더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찾았다. 독자들을 타락시키는 책이라는 비판이 비등했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감성을 자극하는 뛰어난 연애소설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영민한 괴테는 자신의 책을 비판하는 신문 기사를 오히려 소책자로 제작해서 배포했고 더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읽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불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판매한 업자들은 인쇄기를 돌리기 바빴다.
결국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금지하는 일은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 문학 최초의 세계문학이 되었다. 그와 함께 유럽에서 변방의 언어로 취급받던 독일어는 세계 고급 언어로 격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