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접수한 컬렉터의 진심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2023.01.05 10:30:00

반전미 가득한 공간 스페이스
서울 안국역 대로변에 위치한 이 건축물의 이중성은 수위가 높다. 이곳은 애초에 인근 고궁과 한옥들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기에 의연함과 친숙함이 원서동 그 자체이다. 기왓장 느낌의 검은 벽돌과 담쟁이덩굴이 담아내는 사계절의 아름다움은 또 어찌나 감동적인지. 그러나 이런 것들에 현혹되어 마음을 내려놓아서는 곤란하다. 


1층의 아트숍을 지나 계단을 오르는 순간 당황을 면치 못한다. 혼자 온 나이 어린 관객들은 내부의 으스스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시 내려와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도 전해지는 이곳은 반전미 가득한 공간, ‘아라리오뮤지엄 in 스페이스’이다. 아라리오가 자리한 ‘空間(공간)사옥’은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지어졌다. 건축사무소와 월간지 <공간>의 편집실로 사용되다, 1977년 지하에 극장을 설치하고 갤러리를 만들었다. 건축가·무용가·미술가·배우 등 다양한 문화인들이 드나들며,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공옥진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그간 잊혔던 전통예술이 새로운 해석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디딤돌이 마련된 것이다. 이후 통유리 현대식 건물과 한옥건물이 증축되었다. 

 

행동이 운을 만든다
풍수 건축가 박성준은 생각이 아닌 행동이 운을 만든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아라리오뮤지엄 in 스페이스’는 행동하는 인간 김창일 회장의 운명이었다. 그의 시작은 20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 제대 후 어머니가 채권 대신 인수한 천안의 버스터미널 운영을 맡으며,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른바 금수저인 그의 출생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한 달에 300만 원씩 어머니에게 임대료를 내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적자가 한 달에 300만 원씩 이어졌다. 고군분투한 결과 천안 시외 고속버스터미널과 신세계 백화점 충청점 10개관에 이르는 멀티플랙스 영화관의 소유주가 되었다. 


지속하지 못할 만큼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여 때때로 죽음에 가까운 공포의 감정을 느끼는 날들도 있었다. 몇 차례의 위기 끝에 예술이라는 꿈의 세계가 하늘에서 내린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서울에 오면 인사동과 북촌거리를 헤매며 구경하기 좋아하던 그가 동양화가인 남농 허건과 청전 이상범의 작품을 구입하면서 운명이 선회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80년대 초에 방문한 LA 미술관은 그로 하여금 미술관을 꿈꾸게 만들었다.


이후 그의 행보는 할아버지에게 분당땅 5만 평을 달라던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도준(송중기)이 안 부럽다. 김창일 회장은 혹시 미래를 알고 있었을까? 외국에 나갈 때마다 미술품을 사들이게 되었다. 몇몇 작가를 제외하고 당시에 막 떠오르는 신예작가이거나 아직 이름도 모르던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누구나 보지만 다 똑같이 보지는 않는 것. 작품을 고르는 그의 통찰력은 작두를 타야 할 정도의 신내림이었다. 전문아트 컬렉터로 더 이름이 알려진 김창일은 3,700여 점에 이르는 작품 소장가로 세계 200대 아트 컬렉터에 다수 등재되고 있다.

 

그가 세계를 떠돈 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공간사옥’이 경매에서 유찰되었다는 기사를 접한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150억 원에 이 건물을 매입했다. 건물매입에 고민한 시간은 단 1시간이었다. 2014년 9월, 35년간 수집해온 3,700여 점의 작품 중 현대미술 컬렉션을 정리하여 참여작가 39명, 총 147점을 담아 아라리오컬렉션, ‘아라리오뮤지엄 in 스페이스’를 개관했다. 김창일 회장의 사업 길에 그의 꿈과 조우한 귀중한 작품들이었다.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은 “정말? 네가 그걸 했어?”라고 물었다. 개막전 주제는 ‘Really?’ 제목은 직접 지었다.

 

진정 미술관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경사진 지형 덕분에 내부는 스킵플로어 방식으로 설계했다. 계단을 통해 전진하는 각방들은 ‘한 방 한 작가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검은색 파벽돌과 내부가 훤히 보이는 이곳의 용도는 진정 미술관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도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다섯 개 층에 총 38개의 전시공간을 부여했다. 크리스티안 마클레이, 권오상, 바바라 크루거, 신디 셔먼 등의 작품을 감상하며 각층을 오르다 보면 5층에서 다른 계단으로 내려오게 된다. 트레이시 에민, 수보드굽타, 키스 해링, 코헤이 나와, 마크 퀸으로 이어진다. 


이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제는 놀랍지 않은 유명짜한 작가들의 포진이 오히려 놀랍다. 마지막 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묘하게 삼각형 방식으로 감아 올라온 계단 또한 하나의 작품이다. 백남준의 1994년 작 ‘Nomad(노마드)’는 ‘픽셀-더불디어’와 함께 아라리오의 상징작이다. <위대한 미술책>의 저자 이진숙은 말한다. “백남준의 꿈은 칭기즈칸과 마르코폴로 같은 유목의 제왕들이 동서양을 누볐던 것처럼, 디지털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을 동과 서로, 과거와 현재로, 자유롭게 사유의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었다고. 이토록 미래적인 작품이었다니, 그 시대에, 새삼 미안해진다. 


마크퀸(Marc Quinn)의 ‘Self(셀프)’는 말 그대로 작가의 얼굴을 본뜬 틀에 자신의 피를 채워 넣은 시리즈 연작 중 하나이다. 일반 성인의 몸속에 있는 혈액의 총량과 비슷하다는 4,500g. 한 작품당 6주에 한 번씩 5달 정도의 기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두상으로 제작한 거푸집에 혈액을 넣어 만든 작품은 항상 냉동고 형태의 전시대에서 영하 5도의 정해진 온도여야만 현 상태를 유지한다. 전기장치의 작동이 멈추거나 정전이라도 되는 날이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흥건한 피와 함께 사라져 버릴 것. 하단의 냉동고야말로 어쩌면 작품이 존재하도록 하는 유일한 생명의 원천이다. 실제로 사치갤러리 소장작이 전기관리원의 실수로 코드가 뽑힌 채 사라져 버렸다는(거짓으로 밝혀져 소유주의 마케팅 전략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루머는 작품의 섬뜩함을 더해주는 서늘한 에피소드이다. 아라리오의 작품은 5년마다 한 번씩 제작된 3번째(2001년) 작품이다. 케임브리지 로빈슨 칼리지에서 역사·미술사를 전공한 그의 작품은 가는 곳마다 화제다. 

 

코헤이나와는 미국 월간지 <Art+Auction> 2012년도에 ‘미래 소장가치가 있는 50인의 작가’에 선정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인지기능이 2차원적 이미지를 인식한 후 물체를 직접 보고 재인식할 때 생기는 간극과 변화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픽셀-더불디어’는 하나의 사슴처럼 보이는 두 마리다. 애초 인식의 혼란을 의도한 작품이다. 화상의 정밀도를 나타내는 픽셀(Pixel)과 생물학적 세포를 일컫는 셀(Cell)의 합성어 픽셀. 관람자들은 박제된 사슴의 정체는 알지 못한 채, 그저 표면의 영롱함과 실제를 방불케하는 완벽한 자태를 아름답게 느낄 뿐이다. 사슴의 올올한 털이 구슬 안에서 확대되어 보이는 순간에야 마음이 아파온다. 그의 존재는 이미 無(무)화 되었다. 관람자에게 전해지는 우아한 아우라의 정체는 어디서 나오는가?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의 인식은 참인가? 거짓인가? 코헤이나와의 의도는 무엇인가? 생각이 꼬리를 물어 계단참에서 일순간 정지! 뒷사람이 밀어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상이 존중받지 못하는 인간은 눈물 흘린다.

수보드굽타는 인도 현대미술을 회화에서 사진·설치·영상 등으로 지각 변동시킨 거장이다. 진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목록’에 추가하고 싶은 작가이다. 높은 범죄율과 오랜 가난으로 찌든 동인도 비하르주에서 탄생한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슬픔을 잊지 않았다. 작품 <모든 것은 내면에 있다>는 택시의 하부가 무거운 짐 더미에 눌려 땅속으로 가라앉는 상태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성스럽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삶의 도구들을 쌓고 자르고 모아 작품화한다.

아버지의 도시락, 파드미니 택시, 황동제 고물식기, 커리그릇 등. 그의 작품들은 삶의 무게만큼이나 어수선하다. 불가촉천민은 공동우물조차 마실 수 없는 경제부국 인도의 계급 격차는 지구와 명왕성 거리만큼이나 크다. 끊임없는 문제제기로 인간의 삶을 환기시키는 작가는 말한다. “인간의 슬픔은 다른 게 아니다. 가장 작은 일상이 존중받지 못할 때 인간은 눈물을 흘린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을 이어가는 우리들의 일상은 경이롭지 않냐고.


요르그 임멘도르프는 신표현주의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에게 사사 받은 독일 현대미술계의 반항아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예술의 역할’ 단 하나의 질문으로 일관한다. 전후 독일의 혼란과 현대사회의 문제들 앞에서 정치적 표현을 서슴지 않았던 그의 작품은 기괴와 암울, 풍자와 비판으로 가득하다. 1988년 루게릭 진단으로 한 손으로만 그림을 그렸던 그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영혼까지 끌어 모아 이룩한 그의 작품들은 이제 20세기를 기록한 시대정신으로 남겨졌다. ‘미술가의 조상-콘스탄틴, 요르그, 조르지오’ 등에서 보여지는 원숭이 형상들에서는 미술의 사회적 의미에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고뇌를 5개의 조각작품에 담았다. 


제럴딘 하비에르는 동남아시아 현대미술계의 영매이다. 그녀의 시선은 현실과 사회·종교를 넘어서는 운명에 닿아 있다. 클로토와 라케시스, 아트로포스는 각각 실타래를 풀고 길이를 재고 가위로 잘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리스어로 ‘모이라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리스 신화 ‘운명의 세 자매’이다. 이들이 정한 운명의 실타래는 절대적이어서 제우스조차 바꿀 수 없다. 섬세한 뜨개질로 둘러싸인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수목들 사이를 걸어가야 한다. 운명의 숲이다. 도망칠 수 없다. 이것이 삶이라니. 

 

진격의 거인 아라리오
현재 아라리오는 갤러리 상하이에 이어 제주에 3개관을 오픈했다. 그 확장세가 진격의 거인이다. 본래 건물의 기능(시네마·바이크샵·모텔)과 뮤지엄을 연결하여 아라리오의 키워드인 보존과 창조의 의미를 제주에서 이루어 가고 있다. 아라리오 뮤지엄은 도슨트와 함께, 혼자 또는 같이, 갈 때마다 새롭다. 


한옥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매우 맛이 있다. 건너편 통유리 건물 5층의 ‘다이닝 인 스페이스’는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올 때 도심 속 우주선이 된다. 10월경이 되면 창덕궁 후원의 정취를 한눈에 즐길 수 있어 자리 잡기가 힘들다. 안국역을 지나다 눈을 맞아 헐벗은 담쟁이가 눈길을 끌 때 슬쩍 넘어가 주자. 작가와 작품의 서사로 짙은 관람의 여운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숙 서울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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