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가르치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교감 선생님이 들어왔다. 유치원 선생님이 독감으로 결근이라며 보결 수업을 해야 한단다. 본인이 1, 2교시 수업을 할 테니 나에겐 3, 4교시를 맡으란다. 유일하게 병설 유치원 수업권이 있는 방과 후 담당 교사와 연락이 안 되어서 관리자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덧붙인다.
급한 공문을 처리하고 11시가 조금 못 되어 유치원에 갔다. 아이들이 반긴다. 3년째 근무하며, 비슷한 시간에 점심을 먹기에 날마다 인사를 나눈다. 하던 활동을 정리하고 이제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라고 알리며 교감 선생님은 나간다. 색연필과 사인펜이 담긴 자신의 연필꽂이를 하나씩 가지고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마침 근무 중인 하모니 선생님이 복사 용지 이면지 모아 둔 상자를 가지고 와서 한 장씩 나눠준다.
내 옆에 앉은 찬유는 다섯 살이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한때 나와 같이 근무했다. 교육부에서 추진하는 100대 교육과정을 준비하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던 시절, 그 일을 맡아서 하던 연구부장이었다. 도에서 통과하고 교육부에 제출한 보고서를 다듬는 동안 정시에 퇴근하기는 어려웠다. 아이들 수업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는 다시 교무실에 모였다. 진로 부분을 고칠 때는 진로 담당 선생님, 환경이나 독서를 손보는 날이면 담당 선생님이 남았다. 빨리 끝나는 날은 아홉 시, 목전에 닥쳐서는 새벽에 퇴근하는 일도 잦았다. 그 일을 지치지 않고 묵묵히 해내던 선생님이 바로 찬유 아버지였다. 열정을 바쳐 일하여 몸은 힘들었지만 어려운 과제를 함께 하면서 선생님들과는 끈끈해졌다. 그러니 학교를 떠나고서도 간간이 만났다.
그는 100대 교육과정에서 전국 2위라는 좋은 성과를 거두고 이듬해 학생이 단 한 명 있는 분교로 자청해서 들어갔다. 봄이면 운동장 한쪽에 텃밭을 가꾸고, 물이 많이 빠지는 날이면 갯벌에서 조개나 낙지를 잡으며 교사라기보다는 부모처럼 아이와 놀았다. 조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는 섬에 갇혀 체험의 기회가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와 여러 날 자신의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면서 현장 체험 학습을 다녔다. 학생이 한 명 있는 타 지역의 학교와 연계하여 협력 수업도 실시했다. 그 장면은 스승의 날 무렵에 <인간극장> 5부작으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2년간 섬에 머무는 동안 생긴 아이가 바로 찬유이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4학년, 1학년의 형과 달리 찬유는 천방지축이다. "어머 공룡을 그렸구나. 멋지다." 호들갑을 떠는 내 말에 찬유는 "공룡 아닌데요?" 한다. 뾰족뾰족하게 그린 동물의 등뼈가 공룡 같았는데 아닌가 보다. "그럼, 악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네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라며 아빠와의 친분을 이야기해도 찬바람이 쌩쌩 인다.
찬유 옆에 앉아 있던 태민이와 동갑인 준상이가 나를 그렸다며 종이를 내민다. 머리와 몸통, 그리고 팔과 다리로만 이루어진 사람이다. 얼굴에 안경을 쓴 것만이 나와 비슷하다. 몸통은 파란색, 팔과 몸통에 달린 다리는 온통 붉다. "뭐야? 오늘 원장 선생님은 빨간 치마를 입었는데 치마도 그려 줘야죠." "치마는 못 그리는데요?" 아주 당당하다.
준상이와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던 여섯 살 예주가 소리친다. "선생님, 태민이가 원장 선생님 그리고 있어요." 태민이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이다. 베트남에서 시집온 엄마는 아직 20대이다. 아버지는 다른 지역에서 일하기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하고만 보낸다. 태민이는 또래보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데다 하얗다. 귀공자풍이다. 두 달만 지나면 일곱 살인데 여즉 말을 하지 못한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에게서 두드러지는 문제점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는 쉬지 않고 말한다. "왜 울어? 옳아. 기저귀가 젖었구나." "배가 고팠구나. 엄마가 얼른 맘마 줄게. 기다려." 말하지는 못하지만 조금씩 듣는 귀가 발달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마가 리모컨을 찾으면 갖다주기도 하고, 할아버지 어디 계시냐는 말에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말은 하지 못하지만 내용은 이해한 것이다. 한번 말문이 터지면 바야흐로 언어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런데 타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엄마는 그럴 수가 없다. 겨우 한국어 기본 어휘만 아는 수준이거나 그조차 안되어서 다문화 가정의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말을 익히는데 취약하다. 더 문제인 건 엄마 나라의 모어 간섭으로 정확한 발음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알(r)과 엘(l) 발음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조부모나 다른 가족이 가까운 데 있어 자극을 주면 그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지만 온전히 혼자 육아를 책임지는 형국이면 여섯 살이나 되었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태민이 같은 아이가 생긴다. 올 1년간 교육청과 연계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언어 치료를 받았으나 별 진전이 없다. 출발선에서 뒤지다 보니 학교에 들어와서도 그 격차를 좁히기가 쉽지 않다. 언어는 부모가 아이에게 좋은 언어 환경을 만들어주고, 풍부한 말을 들려주면서 상호 작용할 때 발달한다. 적절한 언어 자극을 받지 못한 태민이는 학교 들어와서도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여 문장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보일 것이다. 특히 학습과 관련된 어휘의 부족과 낮은 문장 이해력이 학습 부진으로 이어질 확률이 크다. 그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여 주는 것이 바로 학교의 몫이리라.
그런 태민이가 그림을 그린다. 완성했는지 큰 눈만 깜박이며 말없이 내게 건넨다. 늘 웃는 표정이라 어여쁘기 짝이 없다. 태민이 옆에 앉은 일곱 살 기온이가 한마디 한다. "원장 선생님 목걸이도 그려야지." 그림이 과감하다. 맨 위의 머리카락부터 맨 아래의 다리까지 화지에 꽉 찬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구석에 조그맣게 그리는 것과는 다르다. 얼굴과 몸의 비율도 적당하다. 안경 안의 웃고 있는 눈, 붉은 원피스, 그 위에 걸친 살구색 패딩 조끼까지 특징을 잡아내는 기술이 절묘하다. 조끼의 깃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관찰력도 대단하고 그 모두를 10분 안에 해 낸 것도 놀랍다. 꼬마 화가라고 아낌없이 칭찬했다. 태민이는 평소에도 동물 그림을 즐겨 그린다. 특히 공룡 그림을 잘 그린다. 인물화는 아마도 오늘이 처음이라며 하모니 선생님이 거든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 기뻤다. 단 20분 수업으로 선물을 받았다고 교감 선생님이 부러워한다.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더니 다들 나랑 너무 닮았다며 한마디씩 한다. 누구나 잘하는 게 있다. 말이 늦은 대신 그림에 월등한 실력을 보이는 태민이. 1년 동안 그린 그림을 모아 ‘꼬마 화가전’이라도 열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