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반환점을 막 돌아설 즈음이면 평지를 걷던 소가 둔덕을 오르듯 헐떡이게 마련이다. 월요일부터 쌓인 피로가 목요일쯤 되면 보따리 풀리듯 슬그머니 밀고 나오는지라 자칫하면 수업도 늘어진 테이프처럼 탄력을 잃기 십상이다. 그래서 목요일 수업은 일부러 아이들의 발표를 유도하거나 아니면 관심을 끌 반짝 이벤트를 준비하던지 그도저도 아니면 긴장의 끈이 풀리지 않도록 수업 분위기를 바짝 조일 필요가 있다.
오늘따라 밀린 업무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수업 시간에 활용할 이벤트를 준비하지 못했다. 이럴 때면 내키지는 않더라도 활시위를 들고 목표물을 겨냥하듯 수업 분위기를 팽팽하게 당기는 것이 상책이다. 내심 아이들을 닦달할 생각으로 교실문을 열고 교단에 올라섰다. 출석부를 펴고 출석 점검을 하려던 순간, 교탁 한 귀퉁이에 배를 깔고 누워있는 여인네가 자석처럼 시선을 끌어 당겼다. 탁상용 달력인데 비키니 차림의 서양 미녀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요염한 자태를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미 저녁 노을처럼 붉게 물든 얼굴은 그렇다 쳐도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누구야, 이런 그림을 올려놓은 사람이”
아이들을 향해 한바탕 호통을 쳤으나 범인(?)이 순순히 나설 리가 없었다. 괘씸한 건지 아니면 기특한 건지 도통 분간이 서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말이야 이런 그림에 눈도 깜작하지 않는……”
여우처럼 마음을 숨기려 해도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길을 잃고 더듬거리고 있었다. 아이들도 눈치를 챘는지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며 재미있다는 눈치였다.
출석 점검도 잊고 서둘러 수업에 들어갔다. 한창 수업을 진행하던 중,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아이들을 바라보니 후문 출입구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맨 끝에 있는 자리라 미처 챙겨보지 못했던 것이다. 짝잃은 기러기처럼 홀로 앉아있는 아이에게 짝꿍의 소재를 물으니 아침부터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급한 업무가 있어 미처 학급 조례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 불찰이었다. 올해는 아이들을 잘 만나서 그런지 사소한 걱정거리도 없을 만큼 학급 운영이 순조로웠는데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이 녀석이 어떻게 된거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아이들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같은 급우라도 워낙 구석진 자리에 위치했기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지 않으면 한 두 시간쯤은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빈자리의 주인은 건두였다. 그리 먼 곳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고향을 떠나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학년 초,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는 마치 이현세의 만화에 나오는 까치와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고슴도치처럼 솟아오른 머리에 부리부리한 눈매와 날카로운 콧날 게다가 뭔가 우수에 잠긴 듯한 표정은 영락없는 만화속 까치 그대로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차에 ‘드르륵’ 소리가 나며 뒷문이 슬그머니 열리기 시작했다. 모든 시선이 뒷문으로 쏠린 순간, 건두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머리카락은 군기 빠진 병사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얼마나 서둘렀으면 교복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아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불렀다. 혹시 기숙사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무슨 사고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초지정을 따져 물으니 사연은 의외로 간단했다. 수행평가를 하느라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6시에 일어나 점호를 받고 하도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부친다는 것이 그만 계속 잤다는 것이다.
한창 잠이 많을 시기에 불과 3시간도 안되는 수면을 취했으니 그 피로의 무게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씻는 것도 잊고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눈가에는 수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늘은 건두가 바빠서 그런지 눈곱이 그래로 달려있네”
녀석은 그제서야 세수를 건너 뛴 것이 생각났던지 얼굴을 돌리고 눈을 비비기 시작하였다. 민망스러워하는 건두의 처지를 생각하여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건두 표정을 보니 아직도 졸음기가 가시지 않은 것 같은데”
“네……”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녀석의 목소리는 여름철 장마처럼 눅눅하기만 했다. 민망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녀석의 가슴 앞으로 재빨리 교탁 한 구석에 놓아두웠던 요염한 그림을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건두야, 이 그림 어떠니?”
수영복을 입은 팔등신 미녀가 눈앞에 나타나자 초승달 같았던 건두의 눈은 보름달처럼 커졌고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지 목을 쑥 내밀었다. 건두의 돌출 행동에 놀란 아이들은 배꼽을 잡으며 웃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건두가 이제 정신이 드는가 보네. 우리 건두가 앞으로 더욱 힘을 내서 생활하라는 뜻에서 힘찬 박수를 보내줄까”
늦잠 탓으로 허겁지겁 뛰어왔던 차에 졸지에 화끈한(?) 사진까지 보게 된 건우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친구들의 뜨거운 성원을 등에 업은 건우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책을 꺼내 들었다.
비록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지만, 아이들이 잠을 줄이면서까지 오로지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치열한 현실에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제쯤이면 우리 아이들이 부족한 잠에서 해방될 수 있을는지 그날이 어서 오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