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시골출신이다. 시골 중에서 아주 시골인 인삼으로 유명한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 근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산을 넘어서 1시간가량을 걸어 다녔다. 중․고등학교는 읍내로 아침 6시 30분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였고, 대학교만 대전에서 다녔다. 집안 형제 4남 1녀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은 맏이와 막내인 필자 두 명 뿐이다. 그래도 자녀들 모두가 공무원이 되어서 시골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 소리를 듣고 있다. 필자 부모님은 일흔을 넘기셨는데 워낙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셨고, 아버지만 나뭇짐 값으로 겨우 천자문과 한글을 깨치셨다. 아버지의 배우고 싶은 열망을 무지했었던 村老가 처마 밑에 숨겨놓은 책을 찾아내어 불살랐다고 하셨는데 그 기분을 어이 설명하랴.
시골집에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가끔 말씀하신다.
“무지렁이 부모 밑에서 저런 자식들이 나왔으니 개천에서 용난겨. 니덜 엄니아버지는 좋것다.”
도시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비웃을 것이다. 무슨 사법시험 합격한 것도 아닌데 기껏해야 7급 공무원 나부랭이 되었다고 용이라니. 경기가 어려운 시절이니 기껏해야 미꾸라지라면 모를까.
개인사를 글머리에 너스레 떨며 장황하게 한 이유는 다름 아닌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의 의미를 재해석해 보고자 함이다. 흔히 어렵고 힘든 집안에서 자수성가하여 대성한 입지전적인 사람들의 성공을 빗대어 하는 말이 과연 옳은 것인가? 가끔 매스컴에서는 이러한 말을 되뇌며, 열심히 하면 모두가 될 수 있다는 뜻을 전달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한 말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능력껏 노력하고, 도전한 사람에게 안 되는 일은 없을 터이니. 그리고 여기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함인데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배경에 숨겨져 있는 가진 자들의 무서운 허구화된 논리를 파헤쳐보자. 이러한 것은 멀리 찾을 필요도 없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될 테니. ‘의지의 000씨, 사법시험 합격(서울대 합격). 부모도 없는 학생가장.’ 이런 제목으로 인간극장을 능가하는 인생드라마가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노력하여 거둔 성과물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소수 그들의 성과물은 정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겨진 것은 없을까?
한겨레신문 기사(2006.11.3.)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부모 직업을 보면 위 내용이 더 분명해 진다. 특히, 올 신입생 10명중 4명의 아버지 직업은 '전문·관리직'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관리직은 의사·법조인 등 전문직이거나 기업체 고위 간부 등을 말한다. 더불어 아버지의 학력이 대졸 이상인 학생 비율은 최근 4년 새 4.8%포인트 증가했고, '과외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학생은 1991년 28.3%에서 올해에는 72.8%로 늘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고소득 직종이라 할 수 있는 전문직과 관리직을 합한 비율이 1991년 22.7%에서 1995년에는 25.6%로 늘었다. 1996∼2001년 사이에는 전문직·관리직 비율이 49.6%(96년)에서 52.8%(01년)로 높아졌고, 2002년에는 38.7%, 올해 신입생 조사에서는 40.7%로 높아졌다. 대도시 출신 학생 비율은 91년 65.5%에서 올해에는 74.4%로 늘어난 반면, 읍·면지역 학생 비율은 1991년에 9.6%였으나 올해에는 6%로 낮아졌다.
이러한 사례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미국의 대학능력평가시험(SAT)을 주관하는 칼리지보드(College Board)가 최근 공개한 2006년 SAT성적보고서를 보면 소득이 높은 가정일수록 SAT점수가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간소득이 1만 달러 올라갈 때마다 영어와 수학 점수가 각각 13.3, 11.8점씩이나 높게 나왔다. 가까운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요미우리신문 최근 조사에 의하면, 일본국민 75%가 '부모소득이 자녀 학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물론 위 서울대 합격생중 읍․면지역 9.6%와 대도시 74.4% 속에는 우리가 말하는 개천의 용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뭄속의 밭에 나는 콩처럼 그 경우는 매우 적다. 그 어려운 서울대나 고등고시 합격을 위해 수많은 경쟁을 또 뚫었으니 이 얼마나 희박한 경우인가.
문제는 이렇게 지역과 계급의 격차로 인하여 가지지 못한 사람이 성공하기 힘든 원천이 개인의 능력인 후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부모의 경제적 여력인 선천적인 것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가진 사회․경제적 富로 인하여 후손인 자식에게도 그것이 대물림되고, 반대의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올바르고 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부의 축적은 잘못이 아니므로 권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00미터 경기를 함에 있어 똑같이 출발선상에서 시작해야만 승부가 공평하고, 진 사람들도 그 승패에 승복하지 않을까?
이른바 사회적 불평등의 본류는 바로 교육기회의 불평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일부 소수의 특출한 사람들은 이런 어려움을 모두 뚫고 사회적 지도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호롱불 밑에서 콧구멍 새까맣도록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는 이제 머나먼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얘기임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바라보자. 저소득층 아동들은 학교 정규교육 외에 받는 사교육이 거의 없고, 고액의 사교육을 받는 아동들에 비해 학업 성취력이 저하되기 마련이다. 또 비싼 입학금과 수업료로 명문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우며(설사 진학한다 하더라도 비싼 학비를 대기가 어렵다.), 종사하는 직업도 전문직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이러한 현실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경제력이 학벌, 나아가 사회적 지위와 등치되게 되면 그 사회는 양극화로 인한 격차가 더욱 커지게 되고 이로 인한 갈등 요인은 더욱 증폭돼 나타나기 마련이다. 정부차원에서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교육보호 급여는 입학금 및 수업료 지원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 외에 소요되는 학비 지원과 함께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교육 성취 프로그램과 건전한 성장을 위한 환경조성에는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민간단체의 손을 빌어 생색내기 예산지원을 하고 있는 정도일 뿐이다.
저소득층 자녀들이 빈곤의 세습을 끊고 더 나은 미래의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전체의 공동의 노력이 우선 필요하다. 적어도 본인이 싫다고 한다면 모를까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선상에서 출발할 수 있는 교육기회의 평등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앞서 말한 이유로 나는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