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권 책을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냥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하여 그린벨트 지역으로 들어서면 어딘가 텐트 하나 칠만한 풀밭 한 군데 쯤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마른 갯벌 공원 갯고랑 옆 한 쪽이거나, 저수지 둑 어디쯤이거나 삼인용 텐트 하나 칠 장소는 있게 마련이다. 사방은 사뭇 신록으로 우거져 있고 바라다 보이는 곳마다 풀밭이요, 물이요, 푸른 하늘이다.
지난해 초가을 나는 삼인용 텐트를 할부로 구입했다. 옛날 텐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간편하고, 색상도 디자인도 고급스러운 텐트를 차 트렁크에 실었다. 말하자면 이동 별장이요, 이동 서재로 활용할 셈이었다. 어느 때 어느 곳이건 설치하는데 5분이면 족하고 하늘빛과 풀빛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색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이 텐트를 4월부터 10월까지 차에 싣고 다니며 시간이 날 적마다 자연 속에 쳐놓고 별장 혹은 서재 삼아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나는 농촌에서 낳고 자랐다. 도시적인 것보다는 농촌적인 것이 익숙하고 정이 간다, 인공적인 화려함보다는 자연적인 소박함에 항상 마음이 끌린다. 복잡한 도회지 거리보다는 한가한 시골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렇다고 내 성격이 괴팍하여 사람을 멀리하고 교유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토요일이나 일요일 저 자연 속에 동화되어 피로한 심신을 회복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옮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푹신하고 두툼한 돗자리도 하나 마련하고 대나무 목침도 하나 준비했다. 책을 읽다가 졸리면 한가하게 낮잠도 한숨 자려는 것이다. 지난 4월부터 틈만 나면 나는 들녘 풀밭이거나 갯벌공원 혹은 저수지 둑에 텐트를 치고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있다. 벌써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이 자연친화적 서재에서 읽었다. 집이나 도서관보다 독서의 능률이 더 오르는 것 같다.
지난 봄 부터 여름까지 야외 서재에서 읽은 책 중에 청마의 서간집 두 권이 있다. 하나는 여류시인 이영도 여사에게 20여 년간 보낸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이고 또 하나는 여류시인 반희정 여사에게 보낸 서간집이다. 모두 옛날에 읽은 적이 있는데 다시 한 번 읽고 싶어 인터넷 중고서점을 검색하여 구입한 책들이다. 청마의 인간적 면모가 그대로 나타나 있는 이 서간집은 내게 다시 한 번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우쳐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스탕달의 '연애론'과 보나르의 '우정론'도 이 텐트에서 다시 읽었다. 수필가 이양하, 영문학자 양주동, 박목월 시인 등 옛 시인 작가들의 수필집을 읽으며 현대 인터넷 시대의 문장과는 달리 긴 호흡이 느껴지는 아날로그 시대의 문장에 깊은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옛 책들을 다시 구입해 읽는 것이 여간 재미있고 유익한 게 아니었다. 특히 연세대 철학교수를 역임한 김형석 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책이다. 나는 열여섯 살 중 3학년 말에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 엊그제 일 같다. 특히 책 말미에 부록으로 수록된 한 신학생의 일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한 한 신학생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저자 김형석 교수에게 일기장 하나를 맡겼다고 한다. 어차피 버리려고 하다가 자기 손으로 버리지 못했으니 교수님께서 읽어보고 임의로 처분해 주십사 하는 부탁과 함께 건네받은 일기장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일기장 내용이 너무 감격스러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어 세상에 소개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부연 설명도 있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결혼을 포기하고 천주교 사제가 되기로 한 젊은이가 영원에 대한 그리움과 한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의 갈등을 기록한 가슴 뭉클한 사연이 담긴 일기였다. 이 감동을 다시 맛보기 위해 나는 10여 년 전에도 같은 책을 다시 구입해 읽었는데 그 책을 잃어버리고 이번에 또 구입해서 읽었던 것이다. 내 연륜 탓인가. 중학교 3학년 때의 그 감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가슴을 울리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나는 지난 여름방학을 들판 나무 그늘에, 혹은 저수지 둑에 텐트를 치고 독서와 글쓰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장차 시집에 수록할 만한 작품도 몇 편 얻었다. 한 편 소개하겠다. 비교적 최근에 쓴 것으로 10월 중순 텐트에서 독서를 하다가 떠올라 적은 것이다.
잠자리는 나하고 동무하고 싶은가보다
시월이 와도 여전 내 곁에 와 날고 있다
어느 늦가을 아침 서리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마른 풀잎에 매달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잠자리는 들녘이 좋아 햇빛이 좋아
제비가 이열 횡대로 도열하여
먼 여행길 마지막 행장을 꾸리는 가을
도회지 누군가 자살 소식이 들려와도
듣는 둥 마는 둥 아랑곳없이
낚시하는 사람 곁에서 콩을 거두는 농부 곁에서
먼 조상들 삶의 방식에 따라
잠자리는 그렇게 날다가 천진스럽게 놀다가
마른 풀잎 위에서 날아오르듯 가볍게 세상을 뜬다
풀잎도 꽃잎도 다 시든 어느 날 아침
-필자의 졸시 '잠자리'전문
숙제로 제출할 독후감을 쓰기 위해 혹은 특정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과 인생의 길을 모색하며 나를 찾아가는 작업으로서의 독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로지 나의 취향과 흥미에 따라 내가 선택하여 읽는 독서는 실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첩경이 아닐 수 없다. 그 즐거움을 무엇에 견줄 것인가. 한 페이지의 감동적인 독서의 즐거움을 달리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양하의 수필에서 맛보는 그 촘촘하고 세밀한 문장 구조의 매력을 어디에서 또 맛볼 수 있을까. 그 지성 그 질서정연한 논리,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감성을 달리 어디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등산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강둑을 내 달릴 때의 쾌적한 즐거움도 좋지만 내 지성과 감성에 신선한 자극을 안겨주는 독서야말로 지상 최고의 쾌락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나는 종종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바라볼 때가 있다. 그들이 높은 지위 혹은 큰 부를 소유했음에도 오직 거기에만 만족해 있을 뿐 독서의 즐거움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다. 특히 마음을 사뭇 설레게 하고, 망연히 먼 하늘이나 지평을 바라보게 할 만큼 감동적인 시를 읽을 때 이런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어쩌면 그와 상응하는 어떤 즐거움이 그에게 있겠지만, 아무리 그것이 그들을 흡족하게 해준다 하더라도 한 편의 좋은 시가 주는 감동, 한 편의 좋은 수필이 안겨주는 즐거움은 따르지 못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사십여 년 전에 발간된 박목월의 수필집을 읽고 나는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너무나 가깝게 느껴져 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시인의 두툼한 수필집을 읽으며 비로소 나는 시인의 참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영 목월의 시세계를 모를 뻔 했다가 천만다행으로 이 수필집을 읽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독서에도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현재의 베스트셀러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청록파 시인들이나 지용, 백석의 시, 혹은 청천이나 무애의 수필을 오늘에 다시 읽으면 우리보다 한두 세대 전 문장과 사회현상, 당시의 풍습 혹은 생활상, 풍미했던 가치관을 일목요연하게 접해볼 수 있어 오늘을 이해하는데도 좋은 참고가 되는 것이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한낮엔 아직도 햇볕이 따갑다. 나는 10월에도 공휴일엔 산과 들에 텐트를 치고 무르익어가는 가을 경치를 바라볼 것이다. 이동 서재로서 텐트의 기능을 잘 활용하여 자연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등화가친을 문자 그대로 나의 생활 속에 구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