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없는 아이들

2009.05.06 13:42:00


시대가 달라지면서 아이들의 모습이 달라진 경우가 많다. 요즘 아이들이 취미가 없는 것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이들은 저마다 취미가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모으는 아이가 많았다. 특히 우표를 모으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정성도 보였다.

가까운 사람에게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다. 흔한 일이지만 독서가 취미인 아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진짜 책을 많이 읽고, 책에 빠져 살았다. 시를 쓰는 아이도 있었고, 산문을 쓰는 아이도 있었다.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아이도 있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기타 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야말로 아이들은 저마다 취미가 하나씩 있어서 자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이 취미가 없다. 취미라야 고작 컴퓨터 게임이 전부다. 또 많은 아이들이 음악 듣기와 영호 보기가 취미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취미가 아니라 잘못된 습관처럼 보인다. 음악 듣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mp3라는 기계에 얽매여 있는 듯 하고, 영화 감상은 불법 다운로드의 다음 단계처럼 느껴진다.

취미(趣味)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을 말한다. 인간이 기쁨을 얻는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흔히 여기(餘技)나 오락을 뜻하는 것으로도 쓰인다.

사실 취미는 좋아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분야에 빠지게 되면, 지속적으로 즐기고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직업과 구별되지만, 취미를 즐기다가 직업으로 택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책을 모으는 취미를 가졌다. 그 시절 나는 잿빛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난 그 시절에 철저하게 혼자라는 외로움에 떨었다. 사는 것도 침묵으로 치달았다. 매일 방황의 늪을 헤맸다. 그 때 나를 잡아준 것이 책이었다. 책에 매혹되어 밤을 밝히는 것이 여러 날이었다. 책이 아니면 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상실감에 빠져 있을 때 의지를 촉발해 준 것이 책이었다. 그때 책이 없었다면, 나는 곁길로 갔을 것이다. 그 고독한 밤을 책이 있었기 때문에 이겨냈던 것이다.

청계천 헌 책방에서 사상계라는 잡지를 보면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 권력에 대항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아픔을 알았다. 대학에 입학해서 유신의 붕괴를 보고, 80년대 암울한 시대에 현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때도 나는 헌 책방 구석에서 보던 ‘금서(禁書)’를 보면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책을 모으는 취미를 가졌다. 대학 때도 군에 있을 때도 책을 사러 부산까지 다니면서 내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역마살을 달랬다. 귓등으로 들은 것이 있어서 잡지 창간호를 사고, 초판본 시집을 샀다. 고서(古書)의 묘한 향기에 취해 돈도 많이 퍼다 부었다.

윤동주의 시집, 한용운의 시집, 모윤숙의 시집. 이 모두가 허름하고 오래된 책이지만 당대의 치열한 시대를 노래하고, 독자들을 온통 사랑의 슬픔으로 물들게 했던 책들이다. 내 서가에는 기증받은 책도 더러 있다. 저자가 직접 멋진 헌사를 써준 책을 모아놓는 것도 각별한 자랑거리가 된다. 어떤 책은 돈 대신에 서점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받은 것도 있다.

내가 책을 모으는 것을 보고 남들은 재산적 가치를 운운했지만, 나는 책을 소유하는 그 자체가 좋았다. 나의 소유욕은 부질없는 탐욕이나 공허한 욕망이 아니었다. 내 소박한 소망을 이룬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나의 분신처럼 안고 있는 책들. 나는 이 모든 책들에 그럴 듯한 장서인(藏書印)을 찍어놓는다. 도장을 찍으면서 책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완전하게 장악했다는 즐거움이 손끝으로 짜릿짜릿하게 온다.

사실 나는 어릴 때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 집엔 책이 많지 않았다. 하기야 먹고 입고만 하는 데고 빠듯하던 시절이었으니 책을 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서 읽은 적이 많다.

지금도 나는 어느 집을 방문하면 눈으로 흘깃흘깃 책이 얼마나 꽂혀있나 보는 습관이 있다. 어린 날 친구의 책을 빌려보면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제대로 돌려주지 못해서 설움도 많이 당했다. 그 설움의 풀이로 모으기 시작한 책, 어쩌면 책을 모으는 것은 세사(世事)의 아주 하찮은 일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물질과 향락으로 쏠리는 요즘 책을 모으는 즐거움은 그 혼돈의 생활에서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이 된다.

당장 읽지 않아도 좋다. 모아 놓은 책은 언젠가 내 손에 들리게 되고 나는 그 책을 통해서 위대한 삶을 공급받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결국 책을 모으는 것은 이처럼 그 책을 전부 읽겠다는 미래의 약속이 내재하기 때문에 또한 즐거운 것이다.

나는 사춘기의 방황을 책으로 달랬다. 책을 모으는 것으로 글쓰기에 취미를 붙였다. 그리고 평생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됐다. 그러고 보면 취미는 나에게 평생의 동반자를 만나게 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내가 마음의 여유와 자족의 삶의 자세로 사는 것도 취미 활동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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