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2009.08.07 12:43:00

나무는 나무라야 한다. 나무를 한자로 목(木)이라고 하는데 이는 동의어가 아니다. 한자어 목(木)은 생명감이 없다. 목은 이미 자연에서 멀어진 우리 생활의 도구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나무만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나무를 한자어로 수(樹)라고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무를 수(樹)라고 하는 것은 한껏 멋을 부린 표현이다. 수는 왠지 귀족적인 느낌이 든다. 외모가 빼어난 나무만을 수라고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나무는 차별하지 않은 표현이다. 나무는 나무라고 할 때 나무답다. 나무는 울림소리로만 이루어져 있어 부드럽다. 나무는 나무라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안정감이 든다.

우리 곁에는 항상 나무가 있다. 집 안에도 동네 마을 어귀에도 나무는 우리와 함께 산다. 나무는 생활에도 필수품이다. 집을 짓는 데도, 취사를 하는 데도 나무가 필요하다. 시집을 보낼 때도 나무로 장롱이며 함을 만들고, 인간이 마지막으로 저승길로 갈 때도 나무에 실려서 이 땅을 떠난다.

아니 인간은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영생을 꿈꾼다. 최근에 수목장이 자리 잡는다는 보도가 있다. 이는 인간이 죽어서 나무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죽어서도 나무와 함께 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생전의 자연회귀를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나무와 함께 살다가 죽어서도 나무 곁으로 돌아간다.

뿌리를 땅에 내리고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 나무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은 현실에 발을 딛고 산다. 나무가 뿌리 내린 땅에서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얻듯이 인간도 현실에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러나 나무는 땅을 향해서 잎을 키우지 않는다. 무거운 몸짓을 하늘로 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늘 이상은 저 높은 곳을 향해 있다.



그래서 나무는 사람과 동일시된다. 뛰어난 사람을 재목(材木)이라고 하고 훌륭한 사람을 거목(巨木)이라고 비유한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인간과 다르다. 나무는 영원성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늠름한 자태가 만들어지고, 풍상을 견뎌온 의지가 돋보인다.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세월의 흐름에 변하지 않는 모습은 인간에게 정신적 표상이 되고도 남는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노거수(老巨樹)도 생명의 영원성을 느끼게 한다. 큰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수호신이다. 동네의 어려움을 다스려주고 가족의 평안을 가져다는 주는 신령스러운 존재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당산나무로 여기고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빈다. 노거수는 수백 년을 한 자리에 서서 마을 사람들의 애환과 기쁨을 내려다보고 왔다. 특히 전란이 많은 우리 역사 속에서 의연하게 버텨온 노거수는 대개 한 마을의 전설과 사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노거수는 이제 나무껍질이 생명을 움틀 것 같지 않은데, 봄이면 작은 이파리를 틔어 거대한 수관을 뽐낸다. 여기에는 정령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나무는 삶을 다하면 목(木)이 된다. 목이 되면 목가구로 우리 곁에 머문다. 목가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멋이다. 목가구는 간결하고 검소하다. 장식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목가구는 보기에도 좋지만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우리 머리맡에 놓고 살았다. 지금도 검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는 목가구가 제격이다.

서양에도 목가구가 있다. 하지만 서양의 가구는 주인의 신분을 과장하기 위해 화려한 장식을 한다. 반면에 우리 목가구는 장식이 없다. 단순하고 나뭇결을 그대로 따라간 장식이 전부다. 서양 목가구는 화려한 칠과 무늬가 있다. 서양 목가구는 소유하는 사람의 부와 권위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 목가구는 만든 장인의 솜씨가 은은하게 빛난다. 서양 가구는 나이를 먹어서 화려함이 다하면 쓸모가 없다. 하지만 우리 목가구는 나이를 먹으면 오히려 품격이 살아난다. 서양의 가구는 힘찬 장식으로 혼자서 빛나지만, 우리 목가구는 자신은 빛나지 않는다. 방에서 주인의 성품을 대신하고 있다. 선비의 방에서는 인격의 격조를 높이고, 여인의 방에서는 온화하고 은은한 가풍을 만들어낸다.

나무는 죽어서도 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목향(木香)이다. 그렇다고 그 향이 코끝을 자극하지 않는다. 주인의 성품을 닮아 은은하게 퍼진다. 목향은 향이 아니라, 슬픔이다. 천년 세월을 지켜온 고요 속에서 영혼조차 말라버린 것이 목향이다.

나무는 청빈(淸貧)을 가르친다. 폭염과 태풍 속에서 끄떡없던 잎사귀들은 어느새 서러운 빛깔로 물든다. 그리고 열매 하나를 얻기 위해 여름내 키워온 잎을 스스로 버린다. 달빛을 받으며 순결해지는 나무는 기도의 자세로 순명을 가르친다.

잎 하나 없는 겨울나무도 감동이 있다. 눈 속에 발을 묻고, 추위를 이기는 겨울나무를 보면 오히려 삶이 충만해진다. 이러한 겨울나무의 역설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삶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믿음과 지혜를 준다. 추위를 온몸으로 버티며 더욱 맑아지는 겨울나무들이 인고하며 생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새삼 삶의 의지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무념무상(無念無想)에 잠긴 나무를 본다.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햇볕이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맑은 하늘 아래 세상을 초연히 바라보는 나무가 되고 싶다. 세속의 명리를 따르지 않는 나무처럼 인생을 담백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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