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연가(戀歌)

2009.08.25 13:50:00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조선 왕조 500년을 지키던 관문이다. 광복 후는 정부 수립이 있었고, 중앙청의 정문으로 자리했던 곳이다. 지금도 가까이는 청와대가 있으니 명실 공히 우리나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해서도 가장 먼저 한 짓이 광화문을 훼손한 것이었다. 계엄령이 내려질 때도 제일 먼저 광화문 앞에 탱크가 등장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광화문에 모여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광화문 주변의 큰 건물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제 활동도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언론과 예술, 문화가 이곳에 집중되어 있고 역사가 함께하는 수도 서울의 안마당이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대한민국이 여기서 하나가 되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도, 국가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국민은 광화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뿐만 아니라, 가수 이문세가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를 했듯이, 우리는 모두 광화문에 대한 추억이 있다. 나에게도 광화문은 마음의 흔적이 남아있다.

나는 광화문 뒷골목에서 오랜 기간 서성거렸다. 고등학교 때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 공부를 멀리하고 여기저기 방황을 했다. 고3이 되어서야 대학을 가야겠다는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광화문 뒷골목에 있는 학원에 갔다.

그곳은 학원 밀집 지역이었다. 세칭 명문 학원이 즐비했고, 학원비도 고액이었다. 나의 학원 행은 우리 형편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삶에 흔들리고 있었다. 공부보다 책을 읽고 싶었다. 부모님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무거웠다. 참으로 힘든 생활이었다.

그때 귀갓길에 나를 달래준 것이 음악이다. 서울고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는 가수 박인희가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가 있었다. 거기서 박인희의 ‘모닥불’이라는 노래가 자주 들렸다.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이라는 노랫말이 마치 나를 위로하는 듯했다.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도 자주 흘러나왔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며 들리는 박인희의 목소리는 애잔하고 슬프게 들렸다.

그때 어린 나이에도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싶었다. 혼자서 가야 한다는 나그네의 길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길이 늘 괴로웠다. 잿빛 하늘같이 슬픈 내 삶을 낭송 배경 음악인 폴 모리아 악단의 ‘이사도라’가 위로해주었다.

군에 갔다 와서도 나는 광화문에 있었다. 제대하고 나니 복학 날짜가 어정쩡했다. 6개월이 넘게 남아 있었다. 법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얀 옷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메고 웨이터를 했다. 판사들, 법원장들의 식사와 차 심부름을 했다. 법원의 최고 책임자 식사까지 담당했다. 행사가 있는 날은 경복궁 내 중앙청까지 가서 일을 했다.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일을 마치고 정동 길을 걷는 것이었다. 그때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모두 배우지 못한 청춘들이었다. 어떡하다보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삶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어쭙잖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친 삶에서도 굽히지 않는 삶의 뜨거움이 있었다. 그들은 역경의 삶에 흔들리면서도 꿈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고, 삶의 동력을 찾았다.

나는 종로에서 미팅을 하고도, 광화문까지 걸어오곤 했다. 전투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날도 우리는 광화문 피맛골 술집에 모였다. 먹은 술을 다시 토해 낼 때까지 끝도 없는 토론을 했다. 작가론 수업 종강도 이곳에서 했다. 솟구치는 시대정신이 없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며 김재홍 선생님께 버릇없이 대들 때 선생님은 오히려 술을 넘치게 따라 주셨다.

광화문에서의 추억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내 삶에서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때는 아직도 그리움이 가득하다. 일상적 삶이었지만, 모두가 일탈의 삶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라는 묘한 역사적 공간의 삶이었기 때문이라는 느낌이다. 그 시절 우리는 어두운 하늘 아래 방황하는 젊음을 안고 있었다. 까닭 없이 서러웠고, 많은 차가움을 참고 겨울을 나야했다. 마음속에 답답함이 풀리지 않는 현실에서 광화문은 흰 눈조차 지저분하게 녹아내리던 기억이 펼쳐진다. 그러면서도 안으로는 뜨거운 생명을 닦으며 밤에도 잠들지 않는 꿈을 꾸었다.

지금 광화문은 풍요와 물질이 넘치는 곳이다. 서울의 중심답게 화려하다. 개인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거대한 집단에 매몰된 곳이다. 하지만 나는 광화문에 사적인 개인으로 돌아와 삶을 즐긴다. 현란하고 사치스러운 곳에서 빛바랜 추억을 물레질하고 있다. 광화문 방황은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 삶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시간 여행이다.
윤재열 초지고 수석교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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