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족에 의해 다시 혼란 속으로
통일 한(漢)제국 이래 삼국시대를 거쳐 다시 중국을 통일한 사마염(司馬炎)이 국호를 진(晋)이라 한 이유는, 물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중국사를 통해서 나온 국호 가운데 춘추시대 제후국 중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던 '진(晋)'의 유사 국호라도 붙이는 것이 정통성 확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강남에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었던 오(吳)나라도 통합함으로써(서기 280년) 재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만 이번에는 진나라[西晋]도 이민족인 흉노에게 멸망당하여 중국은 기나긴 혼란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는데, 무제 사마염은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일가친족들을 제후로 봉하여 영지로 보내 권력을 분산시켜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무제가 죽자 처음부터 진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제후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를 '팔왕의 난'이라 하는데, 10년 사이에 실로 천문학적인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이 시대야말로 중국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으며,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장이었다. 북적(北狄)은 동이(東夷)와 민족적 구별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같은 민족을 이렇게 욕설적인 명칭으로 갈라놓았다. 소위 흉노라 일컬어지는 민족은 포괄적인 의미로 우리 한민족(쥬신 : 조선(朝鮮)의 이두식 한문표현, 단군이 세운 나라를 쥬신이라 부름)의 선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동북아시아의 터프가이 흉노는 아주 흐뭇하였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그들에게 마침내 때가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팔왕의 난'을 일으킨 제후가 흉노의 세력을 끌어 들였는데 이번에는 한족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 동이족으로 동이족을 제압한다) 책략이 아니라, 거꾸로 이이제화(以夷制華 : 오랑캐로 한족을 제압한다)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책략을 썼던 것이다. 그때 흉노를 통치하던 유연(劉淵)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몰고 들어와 나라를 강탈하고(315년) 전조(前趙)를 세웠는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유연(劉淵)이 멸망한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흉노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군대를 끌고 나왔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한족도 아니고 더구나 한나라 황실의 유씨(劉氏)가 아니다. 일찍이 한나라 고조는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화친정책을 썼는데, 한나라 황실과 통혼한 흉노인이나 기타 공이 있는 사람은 '유'라는 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북방민족의 각축장이 된 중원
한편 졸지에 나라를 잃은 진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서기 317년 강남의 건업을 수도로 하여 새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동진(東晋)이라 부름으로써 흉노에게 멸망당한 서진(西晋)과 구별하고 있다. 우리 민족과 근원적 뿌리를 같이 하는 북방민족의 중원진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흉노가 선두 타자로 홈런을 치고 나가자, 이번에는 나머지 민족들이 최소한 안타 내지는 운이 좋으면 장외 홈런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등판, 속속 진루하여 고구려와 형제국이라 볼 수 있는 북위(北魏)가 화북 일대를 통일하는 439년까지 100여 년간 서로 다투면서 10여개의 나라가 난립하는데, 이것이 바로 '5호 16국 시대'이다.
혼란해진 서진을 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흉노의 유연이 전조(前趙)를 세우자, 온갖 나라 이름을 총 등장시킨 국호 엑스포와 같은 상황이 북방민족들의 중원 진출로 100여 년이 넘도록 혼전양상을 보이다가 전진(前秦)이 잠시 중원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동진까지 합병시키려던 전진(前秦)이 예상 밖으로 참패하자, 그것을 계기로 전진에 복속되어 있었던 나라들이 각각 독립하면서 일곱 나라로 분열되었다. 그러다가 서기 439년 약 50여 년 동안의 분열 끝에 북위(北魏)가 화북 일대를 통일함으로써, 서기 420년에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강남의 송(宋)과 더불어 150여 년의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통일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전처럼 극도의 혼란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화북에서는 북방민족이 북위(北魏)·동위(東魏)·서위(西魏)·북제(北齊)·북주(北周) 다섯 나라가 북조(北朝)를 형성하고 강남 일대에는 송(宋)·제(齊)·양(梁)·진(陳) 네 나라가 남조(南朝)를 형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상황까지 갔다. 남·북조시대 등장의 역사적 의미는 중국대륙이 남과 북으로 갈려 두 개의 역사 변화가 별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남조에서는 문화적 변화 그리고 북조에서는 사회·경제적 변화로 요약할 수 있는데, 특히 북조국가의 경우에는 통치근간을 이루는 사회제도의 시스템화가 가장 두드러졌다. 일찍이 흉노계열의 진나라 시황제는 군현제를 시행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꾀하였고,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도 무제에 이르기까지 이 제도를 완성시켜 나갔다.
중원의 혼란기를 틈타 중원에 진출한 화북의 북방 민족 정권도 기본적으로는 한화정책(漢化政策)를 추진하면서도 한족과 차별화되는 사회적 시스템화를 추진하였다. 사실 그들은 무력에서는 한족을 능가할지는 모르지만, 문화적으로는 중원의 한문화에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북조 국가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북위(北魏)는 고구려와 뿌리를 같이 한다는 민족적 인식이 깊었던 국가였는데, 이제는 떠돌이 유목생활을 정리하고 한곳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었다. 어차피 한족을 지배하려면 정착해야 하고 정착하려면 차라리 자신들이 한족문화에 흡수 동화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조상대대의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소위 장강 이북을 송두리째 북방민족이 접수하고 말았다.
우선 한족출신의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정치와 행정 분야에 종사케 함으로써 한족의 불만을 무마시키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국가경영에 동참케 하여 각종 제도와 율령을 제정케 하는 한편, 조세제도도 손질하였다. 북방 이민족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한 사람은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였다. 그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죽자(494년) 친히 상복을 입고 깊은 애도를 표할 정도로 고구려와는 형제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족통치를 위한 북위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도읍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낙양(뤄양 : 洛陽)으로 옮기고 복식과 제도, 의식과 풍습 등을 한조 이래의 유교식으로 개혁하는 한편, 성씨도 중국식을 따르게 하고 효문제 자신의 성씨도 원(元)씨로 바꾸었다.
효문제가 추진한 여러 가지 정책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것은 단연 균전제 도입인데, 서기 485년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처음 실시된 것이다. '균전제'의 주요내용은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토지가 없는 백성들에게 국가가 이를 나누어 주고 경작하게 하고 일정 비율의 세금을 받는 제도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까짓 것 누군들 생각을 못하겠느냐'하겠지만, 춘추 전국시대와 진·한 시대를 거치면서 제후나 호족의 소유물이라는 토지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효문제의 균전제 실시로 당시 토지를 잃고 헤매는 농민들과 전란으로 유민이 된 많은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비율의 세금을 거둘 수 있어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제도 개혁을 통해 한족 흡수해
효문제를 비롯하여 북조 여러 나라들이 율령국가의 틀을 만들어 사회·경제적 변화를 일으켰다면, 남조에서는 문화적 변화를 통해서 중국판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남조에는 송(宋)·제(齊)·양(梁)·진(陳)이라는 네 나라가 있었으나 이들 네 나라의 평균수명(?)은 고작 40여 년 밖에 되지 않는 정치적으로 극히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군사력도 상대적으로 약했으나 오직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문화(文化) 밖에 없었다. 강남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남조의 나라들은 원래 이민족의 지배를 피해서 호족들과 지식인, 귀족들이 대거 남하해서 이룩한 소위 '화이트칼라' 국가였으므로 중원보다 몇 배 화려한 귀족문화가 융성하였다. 강남에서 발달한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東晋),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남조의 네 나라를 합쳐서 '육조(六朝)'라 하는데 육조 시대에 발달한 귀족문화, 즉 '육조문화'를 가리켜서 '동양의 문화 중흥기'라 한다.
중국판 르네상스 시대 연 남조
예술이란 고도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영역이다. 우선 천부적인 끼도 있어야 하겠지만 사회적 분위기도 예술문화가 꽃피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육조는 귀족사회였다. 평균수명(?)이 40여 년 밖에 안 되어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으니 그만큼 황제권은 상대적으로 허약했고, 전통적인 명문가는 입김이 세었기 때문에 아무리 군주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불안정한 정국에서 조정에 출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였다. 강남 특유의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사로잡힌 귀족들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여 수많은 문장가와 화가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예술세계를 키워나갔다.
이때의 대표적 인물로는 서예에서는 왕희지(王羲之), 시인으로는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 회화(繪畵)분야에서는 고개지(顧愷之) 등, 후세 사람의 귀에 익은 쟁쟁한 멤버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 최고(最古)의 문학평론서로 알려져 있는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도 이 시대의 작품이니 당시 예술세계에서는 자유로운 창작과 비평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혼란이 계속되면 민심이 동요하고, 동요한 민심은 심리적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절대적 가치를 찾아 그것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근세기에 와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혼란에서 탈피하려는 민중들의 마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서학이 공인되고 서양세력이 조선을 강타하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동학이 일어나는 등, 혼란과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고도의 정신적 활동을 통해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당시에도 역시 그랬다.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던 만큼 마음에 위안을 줄 그 무엇이 필요했다. 원래 후한 중기 이후부터 전해진 불교는 잠시 주춤거렸다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민중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갔다. 불교는 특히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이 망한 이후 동진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남·북조 시대에 이르자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도 종교적 위안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 중국을 통해서 불교가 전래되었다. 즉 고구려에는 서기 372년(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고,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전하였다(신라에는 그로부터 한참 뒤인 528년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진다).
당시 귀족들은 국가중심의 유가사상에 반발하게 되었다. 언제 현실정치 문제에 연루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자의 도를 익히고 통치의 경세학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따분한 노릇이었다. 솔직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 당시 귀족들의 정서였다. 귀족들의 현실 도피적 도가사상을 청담사상(淸談思想)이라 하며 이를 실천한 사람들이 바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