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선언, 두 개의 교육

2017.09.01 00:00:00

이길상의 <새교육>으로 본 교육사

1986년은 매우 상징적이며 충격적인 두 개의 폭발 사고로 시작했다. 1월 28일 미국에서는 7명의 우주인을 태운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후 73초 만에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발했다. 승무원 중에는 최초의 민간인 탑승으로 화제를 모았던 민간 우주비행사 제1호인 고교 교사 크리스타 맥얼리피도 포함되었다. 우주선과 함께 미국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조사 결과 처음에는 기계적 결함이 원인이었음을 밝혔으나, 그 후 인재였다는 것이 발표되어 더욱 큰 충격이었다. 3개월 후인 4월 26일에는 인류 역사에 남을 또 하나의 큰 폭발 사고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의 오랜 경쟁국 소비에트 연방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원자로가 출력제어 실패로 폭발했고, 원전 근로자뿐 아니라 사고 진압을 위해 투입되었던 소방대원과 운전사 등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같은 환경재앙은 해당 국가뿐 아니라 모든 나라, 모든 인류, 나아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크고 지속적인 위기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를 주도하였던 고르바초프였다.


교육민주화선언과 교육자율화선언
이 두 개의 폭발 사건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체제 말기에 일어났으며, 실제로 소련은 이후 붕괴와 해체의 길로 들어섰고, 미국 또한 냉전 이후 다원화된 세계를 주도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사적 변화의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두 개의 교육계 선언이 눈길을 끌었다. 첫 번째 선언은 1986년 5월 10일 한국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산하 서울·부산·광주·춘천 지역협의회 소속 교사 546명(초등교사 20명)이 발표한 ‘교육민주화선언’이었다. 선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학생들과 함께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우리 교사들은 오늘의 참담한 교육현실을 지켜보며 가슴 뜯었다. 교육개혁은 교육, 인간 및 사회를 보는 관점의 개혁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학생·학부모를 교육 주체의 자리에 확고하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교육민주화의 첫걸음이다. 진정한 교육개혁은 교육의 민주화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요구했다. 첫째,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교육행정의 비민주성, 관료성이 배제되고 교육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해 교육자치제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넷째,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은 배제되어야 한다. 다섯째, 정상적 교육활동을 저해하는 온갖 비교육적 잡무는 제거되어야 하며,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학습은 철폐되어야 한다.


교육민주화선언은 1987년 9월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출범,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출범으로 이어지게 된다.
교육민주화선언에 이어 또 다른 선언이 발표된 것은 1987년 10월 23일이었다. 명칭은 ‘교육의 자율화를 위한 교육선언’(이하 교육자율화선언)이었고, 그 주체는 대한교련, 현재의 한국교총이었다.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가속화되기 시작한 교직 사회의 분열 속에서 대한교련은 제49회 대의원회에서 이 교육선언을 채택했고, 그 전문과 해설이 <새교육> 1987년 12월호에 게재되었다. 교육자율화선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개방화, 사회의 다원화 등 오늘의 추세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또한 오늘날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개방화·자율화의 물결이 야기 시키고 있는 과도기적 혼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우리민족의 탁월한 저력을 발휘함으로써 민족의 화합과 국가의 융성을 위한 공동목표를 기필코 성취하여야 할 것임을 확신한다.


교육자율화선언은 민족의 화합과 국가의 융성을 이야기했고, 깊은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에 기초하여 세 가지를 다짐하고 요구했다. 첫째, 회원의 공고한 단결과 화합을 바탕으로 한 참여의 확대, 둘째, 교직 단체의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법적·제도적 규제의 제거, 셋째, 주요 교육정책에 대한 대한교육연합회와의 협의 또는 단체교섭의 제도화였다.


두 개의 교육선언 이후 30년
교직 사회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던 1987년 10월 29일 대한교련 제21대 회장에 취임한 정범석은 취임 초에 행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교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동안 교련 밖에 있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순수하고 패기 있는 그들의 소리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방침이다(경향신문, 1987년 10월 24일자).” 또한 그는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행해진 해직교사 문제에 관해서도 “금명간 문교부를 찾아가 내용을 알아보고 해직교사의 복직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소통과 화해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원단체의 분열과 갈등 또한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교육을 보는 엇갈린 두 개의 시선이 우리 교육계 전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왔다. 어찌 보면 하나의 교육이 아니라 두 개의 이질적 교육이 동거하는 양상이 되었다.


두 개의 교원단체가 두 개의 선언을 발표한 후 다시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전국의 유·초·중 교원의 숫자는 49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660만 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한 세대 이전에 시작된 교원단체의 분열 내지는 교원단체의 복수화가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않은 결과이다.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할 주체 또한 이땅의 49만 교원들이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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