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화·봄맞이·보춘화…새봄을 알리는 꽃들

2019.03.06 14:49:19

영춘화(迎春花)는 3월 초부터 피는 꽃이다. 꽃 이름은 일찍 피어 봄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춘화를 보러 서울 길상사에 간 적이 있다.


“어머, 개나리가 피었나봐. 진짜 봄인 모양이야. 뉴스 보니까 어디 매화가 피었다고 하더니….”

 

지나가는 아가씨가 친구에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개나리같이 생겼네. 어, 좀 다른데….”

 

길상사에 들어서 법정 스님의 저서·유품을 전시한 진영각 가는 길에 접어들자 한 일행이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개나리’와 닮았지만 보름 먼저 피는 ‘영춘화’

겨울이 춥고 길수록 더 간절하게 봄을 기다리기 마련이다. 필자가 꽃을 보면서 ‘이제 봄이 왔구나’ 생각하는 꽃이 영춘화다. 출근길 지하철역 근처 담장에 영춘화를 몇 그루 심어 놓았는데, 해마다 2월 말부터 꽃싹을 유심히 보며 다닌다. 3월 초 영춘화가 한두 송이 피기 시작하면 ‘이제 목도리를 놓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영춘화라는 이름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복수초와 변산바람꽃, 노루귀도 이르면 2월 중순부터 피지만 아무래도 산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꽃이라 경우가 좀 다르다.


영춘화는 개나리 비슷하게 노란 꽃이 피고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것도 똑같다. 자라는 모양이나 크기가 비슷해 멀리서 보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다. 하지만 개나리보다 보름쯤 먼저 피고, 꽃잎이 대개 6개로 갈라지는 점이 다르다. 개나리는 4개로 갈라지는 꽃이다. 어린 가지가 개나리는 갈색인데 영춘화는 녹색인 점도 다르다. 개나리는 우리 토종인데 비해 영춘화는 중국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들여와 심은 것이다. 길상사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주택가 담장에도 영춘화를 심어놓은 곳이 적지 않았다.


영춘화처럼 이름 자체가 봄을 맞거나 알리는 의미를 갖고 있는 꽃들이 몇 개 더 있다. 봄맞이와 보춘화(춘란)가 대표적이다. 3월에 시골 논두렁·길가에 가면 긴 꽃줄기 끝에 자잘한 하얀 꽃무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꽃은 이름 자체가 봄맞이다. 앵초과의 두해살이풀로, 꽃줄기 끝에 4~10송이가량 꽃이 달린다. 초봄 고향집에서 몇 발짝만 나가면 봄맞이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봄바람에 쓰러질 듯 안쓰럽게 흔들리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서는 꽃이다. 흔한 꽃이라 사진을 보면 “어, 이거 나도 보았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서울 화단이나 공터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꽃잎은 5개로 갈라지는데, 그냥 흰 꽃이면 심심해 보여서인지 꽃 가운데 노란색 동그라미로 멋을 냈다. 줄기와 꽃받침 등에 미세한 털이 나 있다. 꽃샘추위에 대비한 장비일 것이다.

 

봄을 알리는 꽃, 보춘화
3월 남부지방에 있는 산에 가면 가는 잎 사이에서 꽃대가 올라와 한 송이씩 핀 꽃을 볼 수 있다. 흔히 춘란(春蘭)이라고 부르는 보춘화다. 사군자 그림에 나오는 난과 비슷하다. 언뜻 뿌리에서 모여 나는 잎만 보면 도시 화단에 흔한 맥문동 비슷하게 생겼다. 꽃 이름 보춘화(報春花)는 봄을 알리는 꽃이라는 뜻이다. 영춘화·봄맞이와 사실상 같은 뜻인 셈이다. 보춘화는 꽃대 한 개에 하나의 꽃을 피우지만 겨울 제주도에서 피는 한란은 꽃대 하나에 여러 송이 달리는 점이 다르다. 특이하게도 보춘화는 잎이 온전한 개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개체마다 뜯겨나간 잎이 한두 개 있기 때문이다. 겨우내 굶주린 고라니 같은 산짐승들이 뜯어 먹은 흔적이다.

 

난은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로 옛 선비들의 사랑을 받은 꽃이다.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문일평은 그의 책 <화하만필(花下漫筆:꽃밭 속의 생각)>에서 “난은 그 꽃의 자태가 고아할 뿐 아니라 꽃대와 잎이 청초하고 향기가 그윽하게 멀리까지 퍼진다”며 “기품이 우아하고 운치가 풍부한 점이 풀꽃 중에 뛰어나다”고 했다.


몇 년 전 큰 인기를 끈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은 정은궐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소설은 조선시대 가상(假想)의 왕과 액받이 무녀(巫女)의 사랑을 그린 역사 로맨스 소설이다.

 

조선의 젊은 왕 이훤은 호위무사 제운과 함께 온양행궁 근처에서 미행(微行:지위가 높은 사람이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남모르게 다님)을 하다 비를 피해 한 민가에 들어갔다. 거기엔 아름다운 무녀가 있었다. 왕이 정체를 숨겼는데도 여인은 단번에 알아보고 예를 갖춘다. 여인에게서는 은은한 난향(蘭香)이 풍겼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무녀 월이나, 연우라는 소녀가 나올 때마다 난향이 은은하게 풍기고 있다. 왕은 경복궁 취로정에서 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까이 오지 마라! 네게서 나는 그 향이 나를 더 미치게 만들고 있어. (중략) 멀어지지 마라! 내게서 멀어지지도 마라.”


수줍은 듯 단아한 인상을 갖고 있는 월은 난초 향기와 잘 어울린다. 소설책 표지 그림도 난초에 나비 두 마리가 다가가는 장면을 그렸다.


난 또는 난초는 난초과 식물을 통칭하는 말이다. 난초라는 식물은 따로 없다. 난초과 식물들은 잎이 나란히맥이고, 꽃이 좌우는 대칭이지만 상하는 다른 공통점이 있다. 꽃 가운데 아래쪽에는 입술 꽃잎이, 뒷면에는 길쭉한 꽃주머니가 있는 것도 같다. 이런 기본 구성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색과 모양을 가진 종(種)들이 있는데, 편의상 동양란과 서양란, 자생 난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양란은 가는 잎과 은은한 향기, 수수한 꽃 모양을 가졌고, 서양란은 호접란같이 색깔과 모양이 화려하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동양란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보세란(報歲蘭)으로 대부분 푸젠·광둥성 등 중국 남부와 대만에서 생산해 국내로 들여온 것이다. ‘보세’는 ‘새해를 알린다’는 뜻으로, 1~2월에 집중적으로 꽃이 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서양란은 대부분 동남아 등 열대·아열대 지방의 난초를 유럽에서 인위적으로 개량한 것들이다.

 

봄꽃들은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절정을 보이는 꽃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매화가 피고 나면 산수유, 산수유가 피고 나면 백목련, 조팝나무꽃이 만개하는 식이다. 식물 어디에 이처럼 정교한 생체시계가 있어서 제각각 때를 맞추어 피는지 참 신기할 따름이다. 마치 봄꽃들이 차례로 카덴차(연주에서 솔로 악기가 기교적인 음을 화려하게 뽐내는 부분)를 연주하는 것 같다. 봄맞이꽃들이 서곡을 연주했으니 이제 곧 봄꽃들의 화려한 카덴차도 시작이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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