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소녀의 향기, 쇠별꽃

2019.04.03 13:30:00

박범신의 장편소설 <은교>를 읽다가 여주인공을 쇠별꽃에 비유한 것을 보고 참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은 이 소설은 예순아홉 노시인이 열일곱 소녀 은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큰 읽을거리다. 그중에서도 은교를 쇠별꽃에 비유한 대목이 하이라이트다.

 

한 소녀가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소나무 그늘이 소녀의 턱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사위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나는 곤히 잠든 소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열대 엿 살이나 됐을까. 명털이 뽀시시 한 소녀였다. 턱 언저리부터 허리께까지, 하오의 햇빛을 받고 있는 상반신은 하앴다. 쇠별꽃처럼.

고향집 뒤란의 개울가에 무리 져 피던 쇠별꽃이 내 머릿속에 두서없이 흘러갔다. 브이라인 반팔 티셔츠가 흰 빛깔이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나는 고요히 그 애의 머리칼을 만져보았다. 그 애의 젊은 머리칼에선 적멸((寂滅·사라져 없어짐) 없는 빛이 흘러나왔고, 쇠별꽃 같은 향기가 풍겨 나왔다. 셔츠를 가만히 당겨 그 애의 어깨를 가려주었다. 투명하고 싱그러운 어깨였다.

 

첫 번째 대목은 시인이 자기 집 데크 의자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고 있는 은교를 목격하는 순간으로, 시인이 은교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두 번째 대목은 비 오는 날 은교가 시인 집에 와서 자다가 천둥소리에 놀라 시인 옆으로 와서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쇠별꽃은 작은 별처럼 생긴 꽃으로, 꽃색은 희고 잎과 줄기는 초록색이라 첫눈에 싱그럽다는 느낌을 준다. 소설 속 은교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

 

소설은 자신이 남긴 노트를 죽은 지 1년 후 공개하라는 시인의 유언에 따라 변호사가 노트를 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트에는 예순아홉의 노시인이 열일곱 소녀 한은교를 사랑했고, 그의 애제자였던 베스트셀러 작가 서지우를 살해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담고 있다.

 

노시인 이적요는 원래 여성에 대한 욕망을 하찮게 생각했고, 자신을 매혹하는 여성을 만나지도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성기능도 잃었다. 그런 시인이 자신의 집 데크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는 소녀를 발견했을 때 욕망이라는 낯선 감정을 느낀다. 은교는 ‘눈에 확 띄는 미인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귀엽고 해맑고 붙임성이 좋았다. 소녀는 시인 집 청소 알바를 하기로 하면서 수시로 드나들기 시작한다.

 

시인의 제자 서지우는 문학적 재능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노시인이 준 소설을 자기 이름으로 내서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오른다. 서지우와 은교의 관계는 일종의 원조교제 비슷하다. 시인의 집을 찾아와 데크 의자에서 잠들기 전에도 두 사람은 알고 지냈다. 시인은 이런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서지우가 은교와 애정행각을 벌이자 질투와 함께 자신을 능멸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여기에다 서지우가 시인의 단편을 훔쳐가 자기 이름으로 내고, 사람을 시켜 시인을 ‘썩은 관’이라고 모욕하자 교통사고로 위장해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시인은 치료를 거부한 채 죽음을 맞는다.

 

이 소설은 74세의 괴테가 19살의 울리케를 사랑한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4년 전 아내와 사별한 74세 괴테는 마리엔바트라는 휴양지에서 여름을 보냈다. 거기서 괴테는 차분한 성품에다 막 소녀티를 벗고 은은한 여인의 향기를 뿜어내는 울리케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둘 사이는 무려 55년의 나이 차이가 났다. 괴테는 울리케에게 접근해 말린 꽃다발을 선물하는 등 환심을 산 다음 마침내 청혼했다. 그러나 울리케는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전달했다. 괴테는 바이마르로 돌아가는 여정 내내 실연의 아픔을 삭이며 명시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을 써 내려갔다.

 

 

<은교>의 미덕은 노인의 사랑과 욕망을 섬세하게 그려낸 데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시인의 입을 빌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라고 말한다. 특히 잠자는 은교에 대한 묘사, 은교가 입김으로 화아, 뽀드득뽀드득 같은 소리를 내며 유리창을 닦는 장면 등은 감각적이고 생생하다. 소설 속 표현대로 ‘관능적’이다. 특히 노시인의 은교에 대한 사랑과 욕망은 일정한 경계선을 넘지 않고 절제를 보이면서 더욱 빛나고 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은교>를 쓴 이후 ‘여고생 애인이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여고생 애인은 없다”며 “은교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꿈, 이루기 어렵지만 본원적으로 가진 꿈을 뜻하는 관념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여주인공을 쇠별꽃에 비유한 소설을 만날 줄은 몰랐다. 소설 <은교>는 절묘하게도 쇠별꽃이 등장하면서 문학적인 성취와 향기를 더한 것 같다.

 

봄이 되면 전국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꽃, 쇠별꽃

마침 양지바른 곳을 시작으로 쇠별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쇠별꽃은 별꽃과 함께 전국의 집 근처, 산기슭, 길가 등 약간 습한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봄이면 전국 어디서나, 도심 한복판에서도 반경 100미터 이내에서 이 꽃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별꽃·쇠별꽃은 개망초와 함께 ‘잡초’하면 떠오르는 풀이기도 하다. 예쁜 꽃 이름은 꽃 모양이 작은 별과 같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쇠별꽃에서 ‘쇠’자는 동식물 이름 앞에 붙어 ‘작은’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어다. 쇠별꽃 향기는 평소 의식하지 못했는데, <은교>를 읽고 맡아보니 싱그러운 풀내음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쇠별꽃은 카네이션·패랭이꽃과 같은 석죽과 식물이다. 쇠별꽃 등 별꽃속(屬) 식물들은 꽃잎이 다섯 장인데, 꽃잎 하나가 깊게 갈라져 두 개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열 장의 꽃잎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줄기 밑부분 잎들은 잎자루가 길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짧아져 윗부분 잎은 잎자루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별꽃과 쇠별꽃을 구분하는 포인트는 꽃 가운데 있는 암술대 숫자를 보는 것이다. 별꽃은 암술대가 3개여서 삼발이처럼 보이지만, 쇠별꽃은 암술대가 5개여서 바람개비처럼 보인다. 꽃들이 너무 작아서 가까이 들여다보아야 암술대가 보인다. 또 별꽃은 꽃을 받치고 있는 초록색 꽃받침이 꽃잎보다 긴 반면, 쇠별꽃은 짧거나 비슷하다.

 

검붉은 꽃밥이 인상적인 개별꽃도 있는데 산에서 자라고 꽃이 커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이밖에 꽃잎이 살짝만 갈라진 점나도나물, 털이 없어 깔끔한 데다 수술에 노란 꽃밥이 있는 벼룩나물, 꽃잎 5장이 전혀 갈라지지 않고 온전한 벼룩이자리 등도 비슷하게 생겼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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