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환하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 활짝 열렸다. 여기저기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사람들 옷차림도 한결 가볍고 화사해졌다. 경북 의성으로 가는 길. 코끝에 와 닿는 바람결이 상쾌하다. 의성은 봄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고찰이 있고 전통마을이 있고 여기에 노란 산수유꽃을 볼 수 있으니 봄맞이 여행지로 제격이지 싶다. 꽃 피는 새봄, 맘 한번 크게 먹고 시간을 내어 떠나보시길 권한다.
봄이 찾아온 절집의 운치
먼저 천년고찰 고운사로 간다. 중앙고속도로 의성나들목을 빠져나와 읍내 방면 5번 국도를 타고 단촌면소재지를 지나면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곳곳에 붙어 있다.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이 절집은 입구에서부터 일주문에 이르는 1km 남짓한 ‘천년숲길’이 아주 좋다. 숲길의 고즈넉함과 삼림욕의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다. 흙길 양쪽으로 둘러선 소나무들이 그렇게 청신할 수 없다.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숲이 전하는 속삭임이 귓전을 파고든다.
고운사는 먼 데서 온 길손을 반갑게 맞아준다. 아담한 경내에는 고요함이 흐른다. 이 절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고 한다. 고운사(孤雲寺)로 바뀐 건 최치원이 가운루와 우화루를 지은 뒤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따온 것이다. 계곡 바닥 위에 커다랗게 서 있는 가운루와 고운사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온 우화루를 보고 있노라니 지난한 역사의 한 단면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다. 보물로 지정된 석조석가여래좌상과 대웅전 앞의 3층 석탑도 발길을 머물게 한다.
한편 높은 산이 많은 의성에는 고운사 외에도 금성면의 수정사, 안평면의 옥련사, 안사면의 지장사, 다인면의 대곡사 등 크고 작은 사찰이 여럿 있다. 하나같이 이런저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거니와 고운사는 그 중 단연 돋보인다.
전통가옥의 멋과 풍류
의성에서도 점곡면은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고을이다. 어릴 적 고향집 같은 정겨움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고운사에서 나와 산길을 하나 넘어가면 옛 선비들이 살던 사촌마을이 나온다. 의성을 대표하는 양반마을로 안동 김씨와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다. 감목공 김자첨, 송은 김광수, 서애 류성룡, 만취당 김사원, 첨사 김종덕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학자들이 이 마을 출신이다. 이들은 퇴계의 학풍을 이은,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곳에 살던 선비들은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을 마다하는 등 철저한 야인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30여 호의 전통가옥이 빼곡하게 들어찬 마을은 저 안동의 하회마을을 연상케 한다. 마을 한쪽에 있는 만취당(晩翠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우리나라 개인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조선 중종(1582년) 때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 김사원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안동 김씨 종실이다. 만취당이라는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마을 밖 들판에는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1468∼1563) 선생이 연산군 때 관직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영귀정(詠歸亭)도 있다.
사촌마을 서쪽에는 가로숲(일명 서림(西林), 천연기념물 제405호)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이 숲은 약 600년 전 사촌마을 사람들이 바람을 막기 위해 심은 것이 자라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길이가 800미터에 이르며 경상북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숲으로 꼽힌다. 또한 이 숲에는 먹이가 풍부해 해마다 왜가리를 비롯해 텃새와 철새들이 찾아와 살고 있다. 수령 4~500년을 헤아리는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이 우거선 숲은 고즈넉하다.
이 숲은 서애 류성룡(조선 선조 때 영의정) 선생이 태어난 곳이어서 더욱 신령스럽다. 1542년 그의 어머니가 사촌리 친정집에 다니러 왔다가 이 숲에서 선생을 낳았다고 한다. 마을 오른쪽은 광활한 들판이다. 사방이 탁 트여 시원스럽지만 풍수를 잘 따지는 옛 사람들은 길지(吉地)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사촌리 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다. 서쪽에 나무를 심어 풍수로 인한 재난을 어느 정도 막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가는 곳마다 발길이 머물고
길손은 이제 사촌마을에서 읍내를 거쳐 금성면 소재지로 간다. 이곳에도 전통마을이 남아 있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성촌인 산운마을(일명 대감마을)을 일컬음이다. 금성산과 비봉산이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마을에는 학록정사(鶴麓精舍), 운곡당(雲谷堂), 점우당(漸于堂), 소우당(素宇堂) 등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전통가옥 40여 채가 모여 있다. 마을에서 만난 소우당. 안채와 서쪽에 있는 너른 별당채가 눈길을 끈다. 한반도 지도 모양의 인공연못과 노송도 이 집의 격을 높여준다. 전통미 물씬 풍기는 마을(산운리)은 금성산과 어우러져 풍치가 무척 아름답다. 마을에 들어선 생태공원은 학생들의 자연체험학습장으로 아주 좋고 폐교를 활용해 만든 홍보관, 전시실에서 마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금성면 동북쪽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금성산(531m)은 해발 고도가 그리 높진 않지만 국내 유일의 사화산(死火山)으로 태백산맥 남쪽 일부에 해당한다. 정상 북쪽으로 보이는 금성산성과 봉수대 등은 이 산의 내력을 말해준다. 길이가 4km에 이르는 금성산성은 흙과 돌로 축조한 방어 시설로 의성 관내에는 10여 개의 산성 흔적이 남아 있다. 등산로는 금성산 본 코스(약 3시간 소요)와 다인면 북쪽의 비봉산 연계 코스(약 5시간 소요)가 있다. 비봉산 정상에 서면 사방 100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탑리여중 옆 옛 면사무소 자리에 서 있는 탑리5층석탑(국보 77호)도 볼만하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벽돌 모양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이다. 천년의 침묵, 시간의 더께가 만들어낸 석탑의 진수라 할만하다.
제오리에 있는 공룡 화석지(천연기념물 제373호)에도 들러본다. 저 아득한 시대(중생대 백악기)의 산물인 이 화석은 4종 316개의 화석이 70도 정도 기울어진 도로변 경사면 퇴적암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지방도로 확장 공사 중 산허리 부분 흙을 깎아내면서 발견했다고 한다. 발의 구조와 크기, 보폭 등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금성면 소재지 초입 오른쪽 언덕에는 옛 고대읍성 국가인 조문국 사적지가 있다.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 벌휴왕에게 복속되기 전까지 21대왕, 369년을 존속한 북부지역 최대의 고대국가이다. 나지막한 구릉지에 조문국의 왕이었던 경덕왕릉을 비롯해 여러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조문국박물관(054-830-6915)에서 조문국의 역사와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와 유물, 당시의 장례문화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의성에는 천연(天然)의 계곡도 있다. 빙혈(얼음구멍), 풍혈(바람구멍)이 있는 빙계계곡(춘산면 빙계리)이 그것이다. 여름엔 얼음이 얼고 겨울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신비의 계곡이다. 춘원 이광수는 소설 ‘원효대사’에서 이곳을 무대로 요석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마을 뒷산 계곡 한쪽 바위 여기저기에 뚫려있는 얼음구멍은 어른 네댓 명이 들어서면 꽉 찰 정도로 좁고 깊다. 빙계계곡은 그 안에 8개의 절경(빙계 8경)을 두고 있으니, 계곡 절벽 아래 반구형으로 패여 있는 용추(용소)를 비롯해 정오가 되면 햇빛이 인(仁)자 모양의 그늘을 만든다는 인암, 물레방아(수대), 풍혈, 의각, 오층석탑(보물 제327호), 빙혈, 불정 등을 일컬음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노란 산수유
읍내에서 11㎞쯤 떨어진 사곡면 화전리는 산수유마을로 유명하다. 해마다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경이면 마을 개울가와 언덕이 노란 산수유꽃으로 뒤덮인다. 이 일대에 퍼져 있는 15~300년 된 산수유나무는 3만 여 그루에 달한다. ‘영원불멸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산수유꽃은 주위의 마늘 밭과 어울려 잔잔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가볼 곳은 신평면 중률리. 우리나라 최대의 왜가리, 백로 도래지다. 왜가리와 백로는 해마다 2~3월에 찾아와 8월 초순에 떠나는데, 5000여 마리의 새들이 산을 덮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왜가리와 백로는 그 생김새가 비슷한데 백로는 백학 또는 청학(등이 청회색을 띤다)으로 부르기도 한다. 왜가리는 의성군을 상징하는 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