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치’ 망태기엔 칡꽃·들국화·동백꽃 가득

2020.10.06 10:30:00

박상률의 <봄바람>은 열세 살 섬 소년의 생활과 방황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동네 여자아이와 풋사랑, 서울에서 전학 온 여자아이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성공을 꿈꾸며 시도한 첫 가출 등이 주요 이야기다. 1997년 첫 출간 이후 개정판이 거듭나오며 이제 ‘성장기를 거친 모든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출판사 설명이다.

 

 

성장기를 거친 모든 이들을 위한 소설 <봄바람>

주인공은 진도 농촌마을에 사는 열세 살 소년 훈필이다. 마을 아이들은 뭍으로 나가 성공해 돌아오는 것이 꿈이다. 훈필이 역시 넓은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궁색한 가정형편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다.

 

어느 날 아버지는 훈필이 몫으로 염소 한 마리를 사 온다. 새끼를 늘려 중·고교에 갈 학비를 마련해보라는 것이다. 훈필이는 염소를 열심히 돌본다. 염소 새끼를 늘려 푸른 목장을 세우고, 같은 동네 여자아이 은주와 결혼해 푸른 목장을 경영하는 꿈에도 부푼다. 그런데 서울에서 전학 온 여자아이에게 마음이 끌리는 와중에 애지중지 키운 염소가 허망하게 죽는다. 상심한 훈필이는 하루라도 빨리 도시로 나가 성공하겠다며 가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뭍으로 나가자마자 집에서 갖고 나온 돈을 모두 털리고, 사흘 만에 섬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봄바람이 불면 어김없는 시골 청소년들의 가출 행렬, 품앗이와 은밀한 입소문 같은 어른들의 행태, 지루한 교장과 담임선생님의 훈화, 동네 이장의 마이크 공지 등 어릴 적 겪어본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진한 남도 사투리도 정겹다.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이 특히 필자 관심을 끈 것은 망태기에 늘 꽃을 꽂고 다니는 동냥치 ‘꽃치’가 나오기 때문이다. 꽃치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망태기에 가득 담은 꽃과 노랫가락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동냥치다. 꽃치가 꽂고 다니는 꽃은 당연히 ‘그 계절에 피는 꽃’이었다. 봄에는 찔레꽃, 여름엔 칡꽃, 가을엔 들국화, 겨울엔 동백꽃을 꽂고 다니는 식이다. 칡꽃에서 동백꽃까지 꽃이 나오는 장면을 보자.

 

<망태기엔 어김없이 꽃이 가득 꽂혀 있었다. 이번에 꽂고 온 꽃은 불그스름한 칡꽃이다. 칡덩굴이 망태기를 친친 감고 있었고, 칡꽃과 잎사귀가 온통 망태기를 뒤덮고 있었다.>

 

<추석을 앞뒤로 해서 거의 달포 가량 보이지 않던 꽃치가 들국화가 피어남과 동시에 고개를 넘어왔다. 그의 망태기엔 노란 들국화와 하얀 들국화가 잔뜩 피어 있었다.>

 

<꽃치는 고갯마루에 군락을 이룬 동백 숲의 한쪽 언덕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를 잡고 있었다. 이를 잡는 걸로 보아 꽃치의 몸에도 분명 따뜻한 피가 흐르리라. (중략) 꽃치의 망태기엔 동백꽃 수십 송이가 꽂혀 있었다. 마치 망태기에 처음부터 동백꽃이 피어 있던 것처럼 보였다.>

 

 

어김없이 꽃치의 망태기를 뒤덮고 있던 계절꽃

칡은 알면서도 칡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눈여겨보면 7~8월 한여름에 자주색 꽃잎에 노란 무늬가 아주 인상적인 꽃이다. 칡꽃은 참 향기가 좋다. 향기가 진하고 멀리 가 10여㎞ 떨어진 곳에서도 주변에 칡꽃이 핀 것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칡꽃 향기는 어떻게 표현할지 난감하지만, 아주 싱그러운 향이다. ‘와인향처럼 좋은 향’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다.

 

꽃치 망태기에 ‘노란 들국화와 하얀 들국화’가 잔뜩 피어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들국화라고 하는데, 들국화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은 따로 없다. 들국화는 야생의 국화를 통칭하는 말인데, 보라색 계통의 들국화는 벌개미취와 쑥부쟁이, 꽃이 흰색인 것은 구절초, 노란색인 것은 산국과 감국이 대표적이다. 그러니까 꽃치의 망태기에는 산국이나 감국, 그리고 구절초가 가득했을 것이다. 찔레꽃은 좋아하는 동네 여자아이 은주를 생각할 때 나오고 있다.

 

<산으로 가는 길옆 밭둑의 울타리를 이룬 찔레나무에 하얀 찔레꽃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누가 일부러 심은 적도 없는데 밭둑의 울타리로 스스로 자라 있는 찔레나무. 찔레나무는 그 자리가 아주 잘 어울렸다. 나는 찔레나무의 가시를 피하며 여린 찔레순을 꺾어 입에 물고 걸어갔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갑자기 은주 생각이 났다.

‘은주헌티도 찔레순을 꺾어다 줄까? 아녀, 은주헌틴 물병에 꽂아 놓으라고 찔레꽃 줄기를 몇 가닥 꺾어 주는 게 좋것어. 근디 가시가 있은께 조심해서 다뤄야 될 틴디.>

 

어려서 뽑아먹은 삐비가, 삘기가 아니라 당당하게 ‘삐비’가 나오는 소설을 처음 보았다. 삘기는 여러해살이풀인 띠의 어린 꽃이삭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연한 상태인 것을 말한다. 삐비는 삘기의 사투리인데, 우리 동네에선 삐비라고 불렀다. 언덕이나 밭가에 많은 삘기를 까서 먹으면 향긋하고 달짝지근했다. 그러나 삘기는 쇠면 먹지 못하기 때문에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잠깐이었다. 삐비도 은주를 생각하는 대목에서 나오고 있다.

 

<동생을 돌보고 염소를 기르는 일만으로도 꽤 바빴지만, 머릿속은 온통 은주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염소를 데리고 산에 오르내릴 때마다 산으로 가는 밭둑이나 산언덕에 삐비가 있으면 뽑아 모았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씹기에 부드러운 여린 순만 모았다. 기회를 보아 은주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남도가 배경인 소설답게 배롱나무집이 나온다. 배롱나무는 요즘엔 서울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예전엔 남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나무였다. 이 나무 표피를 긁으면 간지럼 타듯 나무가 흔들린다고 해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부른다. 실제로 간지럼을 타는 것일까. 사람이 나무에 다가갈 때 이는 바람에 나무가 흔들린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 있다. 배롱나무 수피는 반질반질하다. 표면이 너무 매끈해 나무 잘 타는 원숭이도 미끄러진다고 일본에서는 ‘원숭이 미끄럼나무’라 부른다. 아래 배롱나무집이 나오는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잘 나와 있다.

 

<월남 갔던 배롱나무집 셋째 아들이 돌아온 것이다. 그 집 마당엔 오래전부터 나뭇가지가 미끌미끌해서 원숭이도 미끄러져 내린다는 배롱나무가 있어서 배롱나무집이라고 불린다. 배롱나무는 또 간지럼을 잘 탄다고 하여 아이들은 어쩌다 그 집에 들어가면 매끌매끌한 나뭇가지를 만지며 간지럼부터 태우곤 했다.

아이들은 저녁이면 배롱나무집으로 몰려들었다. 월남에서 당당하게 돌아온 셋째 아들의 무용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월남에서 베트콩 잡은 이야기를 신나게 해 주었다.>

김민철 조선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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