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너를 부르기까지

2023.04.07 12:52:14

01.

대학 신입생 시절 동아리의 한 선배는 나 같은 시골 출신 촌뜨기 신입생 후배들에게 농담조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선배는 ‘이성에게 호감 얻는 법’,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작업의 기술’쯤 되는 강의(?)를 해 주었는데, 재현해 보면, 대충 이런 거였다. 

 

“야, 너희들 시골에서 서울에 오니, 서울 여학생들과 사귀고 싶지? 그런데 촌놈이라는 열등감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을 거야. 서울 물정과 서울 인심과 서울 문화에 빨리 적응해서 서울 여학생과 데이트라도 한번 하려고 할 테지만, 그런 접근은 성공하기가 어려워. 서울에 십 년을 살아도 촌티는 잘 벗겨지지 않아. 정말 사귀고 싶은 멋진 여학생이 있으면, 화려한 카페나 주점에 데려가지 말고, 그녀를 야생화 피어 있는 들길로 데려가거라. 시골 출신이 잘할 수 있는 게 뭐겠니? 그 서울 여학생에게 풀꽃 이름들을 하나씩 가르쳐 주며, 그냥 그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그 데이트는 성공하게 되어 있다.” 

 

우리 중에 누군가 장난기 섞인 질문을 했다. 
“좋기는 한데요, 그건 낮에나 가능한 데이트이지요. 저녁 시간 이후에는 산이나 들에 가 있기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좀 분위기 있는 주점이나 카페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좋아! 도회지의 어떤 장소에서 저녁 데이트를 하더라도, 되도록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을 택하라. 카페나 주점도 그런 곳이 있잖아. 그리고는 그녀에게 별자리 퀴즈를 내면서 별자리 이름과 별들을 가르쳐 주는 거야. 이 역시도 성공률 80% 이상을 보장한다.”

 

누군가 다시 푸념 섞인 질문을 했다. 
“풀꽃 야생화, 그냥 무심히 보고 지나쳤지요. 이름 아는 게 없어요. 별자리 이름, 그거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거뿐인데, 다 까먹었어요.”

 

선배가 제법 준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너는, 자연 속에서 자란 시골 출신이라는 둥, 자연환경 생태가 중요하다는 둥, 어쩌고저쩌고하며 자랑하지 말아야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청년, 그런 말도 하지 말아야지. 풀꽃도 모르고 별자리도 모르고…. 네가 시골에서 살았던 너의 존재 이유는 뭐니? 너, 그러니 이런 말은 더더욱 모르겠지?”
“제가 무슨 말을 모른답니까. 무슨 말을요? 말씀해 보세요. 아는지 모르는지.”
“봄의 대지에 피어나는 이 무수한 풀꽃은 밤하늘 총총한 별들이 내려온 것이다.”
“그게 무슨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말입니까?”
“내가 한 말이다. 왜?”

 

대충 이런 말들이 오간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농담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라, 모종의 철학을 느낄 만하다. ‘작업의 기술’ 차원보다는 훨씬 심오한 그 무엇이 있다.

 

02.

내 고향 황악산에 봄이 온다. 괘방령(掛榜嶺) 넘어, 충청도로 가는 길, 매곡면 오곡실(梧谷室) 지나, 푸른 호수를 돌아서 산골길을 걷는다. 갖가지 풀꽃들이 걸음마다 피어 있다. 봄의 생명 기운 굽이치는 길, 아지랑이 저편으로 이어지는 길, 이 신명을 어이 할까. 발길 아래 피어서 봄바람에 흔들리는 풀꽃들 표정에 마음이 멈추어 선다.


나는 풀꽃의 이름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것도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골 농촌에서 살았지만(내 아버지는 시골 학교 선생님이셨다), 농사를 짓지 않아 들과 산에 바짝 다가가지 못하였다. 집에 소가 없어서, 소에게 꼴(풀)을 먹이려고 야산 등성이를 돌아다녀야 하는 축에 끼지도 못했다. 촌에 살았지만, 나의 산야(山野) 경험은 제한적이었다. 그러하니, 나무며 풀꽃이며 그 이름을 제대로 많이 안다고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지금 나는 야생의 풀꽃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부럽다. 산길 들길을 가면서는 풀과 나무, 그리고 꽃의 이름을 잘 아는 사람이 으뜸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일행에게는 선생이고 리더이고 대장이다. 그가 원치 않아도 그리될 수밖에 없다. 그런 능력은 야생화 도감을 외운다고 해서 쉽게 체득되는 내공이 아님을 나는 안다. 이제 나는 서울 여학생에 대한 열등감은 사라졌지만, 풀꽃 나무꽃 이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주눅이 든다. 그가 야생의 식물들과 몸으로 친화되어 온, 그 ‘마음의 과정’에 존경심이 드는 것이다.

 

야생 풀꽃의 이름은 대개 우리 고유어이다. 음미해 보면 토박이말의 묘미가 은은하다. 고유어이면서 복합어로 된 이름이 많아서 그 이름이 그 이름 같은 착각에 들기도 한다. 여러 번 이름을 들어도 그것만으로 그는 내게 다가오는 이름이 되지는 않는다. 이름 참 이쁘다 하면서도 풀꽃의 자태는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옆에서 누가 이름을 가르쳐 주면, 아! 이게 그 꽃이란 말이야? 하며 눈길을 주지만, 또 금방 잊어버린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두메닥나무’, ‘변산바람꽃’, ‘봄까치풀’, ‘하늘매발톱’, ‘털별꽃아재비’, ‘꽃범의꼬리’ 등이 그런 부류에 든다. 

 

내가 감관(感官)과 지각으로 터득하여 알아가고 있는 풀꽃 중에는 ‘은방울꽃’, ‘상사화’, ‘구절초’, ‘개망초’ ‘청노루귀꽃’ 등이 있다. 풀꽃의 이름과 존재를 온전히 알아서 부를 수 있으려면, 그와 내가 생태를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풀꽃과 익어져 얻는 친숙함이 있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발효과정이다. 그냥 이름만 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단계에서 신영준 교수가 쓴 <풀꽃의 비밀>과 <나무꽃의 비밀>을 들추어 본다. 

 

그런데 나도 아주 문외한은 아니다. 내 나름으로 친숙한 풀꽃이 있다. 자랄 때 시골 농촌에서 살며 토끼나 돼지를 먹일 풀을 뜯고, 친구들과 산딸기나 오디 열매를 따고, 군불을 지필 땔나무를 구하러 산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야생의 풀꽃들을 몸으로 친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과 자태는 물론이고 자라는 생태를 구체적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풀꽃들이 있다. 이를테면 비비추·익모초·질경이·달개비·강아지풀·백일홍·봉선화·할미꽃·엉겅퀴꽃·비름 등이 그러하다. 나는 적어도 이들 풀꽃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수 있다. 이들과 함께했던 생태의 기억과 몸이 쌓아 온 내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풀꽃은 무수히 많다. 

 

안도현 시인의 짧은 시 <무식한 놈>에서 그 ‘무식한 놈’이 바로 시인 자신임을 토로한다. 들꽃에 무심하고 자연생태에 둔감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시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절교한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이 어찌 안도현 시인만의 반성이겠는가. 나의 반성도 여기에 머문다. 우리 교육의 반성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03.
한국인이 가장 널리 공유하는, 그래서 우리 국민의 시적 교양을 담보해 주는 대표적 시구(詩句),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첫대목을 다시 불러와 본다. 시인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라고 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일의 소중함, 그것이 빚어내는 관계의 진정됨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주의 질서인지를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그 ‘불러줌의 따뜻한 질서’ 안에서 비로소 존재다운 존재가 탄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데 이름을 그냥 부르기만 하면 되는 걸까. 아닌 것 같다. 그의 존재를 제대로 불러줄 수 있으려면, 만만치 않은 이해의 내공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내 밖에 있는 조그만 풀꽃 한 송이라도, 그를 온전하게 불러주기까지에는 내 몸이 다가가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놓여야 하리라. 이를테면 그에 대한 ‘생태적 이해’가 차분히 쌓여야 하리라. 


풀꽃 송이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어떠하랴! 너를 부르기까지, 너 모르는 사이에 너에게 무수히 다가가, 나는 너를 거닐었노라. 너를 부르기까지!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한국독서학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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